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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보는 오후>/우리나라 드라마소식

[신민경의 티비아웃] 괴물이 깨어나는 순간

전국 상위 0.1퍼센트의 엘리트들만 모인 곳. 고립된 지역에 있는 수신고등학교는 공부 이외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했고, 학생들은 학교를 '3년 만기 알카트라즈'라 부르며 살아간다. 마지막 회,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출동한 형사가 "무슨 놈의 학교가 요새도 아니고…"라고 중얼거린 것은 이 공간의 정체성을 잘 설명해 주는 장면이다. 온기 한 점 없는 이 학교는, 괴물이 침투하기에 최적의 공간인 셈이다.

지난 3월 20일 종영한 'KBS 드라마 스페셜 연작 시리즈' 3탄 < 화이트 크리스마스 > 는 초반까지만 해도 단순한 학원 스릴러처럼 보였다.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새해 첫날까지, 1년 중 유일하게 허락된 8일간의 방학. 달콤한 휴식을 위해 다들 학교를 떠난 사이, 누군가로부터 편지를 받은 아이들은 학교에 남아 있다. 편지는 이들이 '한 입씩 깨물어 누군가를 살해했다'며 단죄하려 한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일까? 이들이 저지른 죄는 무엇이고, 이들에 희생당한 이는 누구일까? 자부심의 크기만큼 불안도 큰 아이들 사이에 (당연히!) 요동이 일어나지만, 의외로 범인 색출은 아주 싱겁게 끝난다. 그러니까 진짜 이야기는 연쇄살인범 김요한(김상경)에게 문을 열어주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지만, < 화이트 크리스마스 > 는 학원 드라마가 아니다. 성적에 대한 고민이나 이성 교제, 왕따, 가족 문제, 우정 등은 이 드라마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김요한이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마음만 먹으면 여덟 명의 아이들은 그를 제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요한이 아이들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은 총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 내면의 괴물을 깨우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게다가 그는 정신과 의사다).

김요한의 목적은 살인이 아니라 실험이었다. 괴물은 태어나는 것일까, 길러지는 것일까. 그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아이들을 엄정한 게임에 초대한다. 결국 < 화이트 크리스마스 > 는 잔혹한 심리 게임이자, 악이 태어나는 과정을 냉혹하게 관찰하는 드라마다. 물론 그 무대가 학교로 설정된 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공부가 노동이라면 (이 학교는) 벌써 고소당했을 걸? 24시간 중 18시간을 공부하는 곳에서 뭘 바라냐."

숙직 교사가 무심결에 던진 이 말은, 학교 역시 아이들을 괴물로 만든 책임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김요한의 말대로, 냉혹한 경쟁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학교는 '사자가 기다리는 강가'나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는 곳.

초반 4회까지 < 소년탐정 김전일 > 식의 추리물로 흐르던 드라마는, 그 이후 김요한과의 심리 싸움에 접어든다. 이쯤 되면 누가 편지를 보냈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폭설에 갇힌 아이들은 이미 마음속에 있는 괴물을 느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이들의 도플갱어일지도 모를 김요한. 그는 아이들 안에 잠재된 괴물을 끌어내기 위해 위선적인 부모들까지 동원하는데, 아이들이 괴물이 되면 김요한이 이기고 괴물이 되지 않으면 아이들은 이 싸움에서 이기는 셈이다.

아이들은 선택해야 한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죽을 것인가, 괴물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될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해도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결국 괴물은 태어나는 것도, 길러지는 것도 아니었다. 괴물은 그저 깨어날 뿐이다. 악이 깨어나는 과정을 창백하게 그린 < 화이트 크리스마스 > 는 분명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드라마다.

일요일 밤 11시라는 불리한 시간대가 저조한 시청률을 낳았겠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이 파격적인 드라마가 편성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내용에 맞는 새로운 형식의 등장 또한 반갑다. 미니시리즈 위주의 편성을 뛰어넘은 'KBS 드라마 스페셜 연작 시리즈'를 앞으로도 계속 주목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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