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앞이 지옥이다. 아이들은 친구와 인사하고 뛰어놀며 상쾌한 아침을 시작하지만 엄마들은 살얼음 같은 거리를 아슬아슬 걷는다. 어제의 안부를 묻는 인사도 내일의 소풍을 의논하는 대화도 시커먼 어둠 한 움큼씩은 숨기고 있다. < 후지TV > 의 화요드라마 < 이름을 잃어버린 여신 > 이 그려내는 엄마들의 관계는 한치 앞도 모를 지옥 같다. 여고생 사이의 질투보다 질퍽하고, 첩보 스릴러 영화의 음모만큼 치밀하다.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고 아이의 자랑이 과시를 위한 훈장이다. 쪼들리는 가계, 남편의 실직, 아이의 시험 성적, 흔들리는 부부관계 등 소재는 일면 사소하고 보편적이지만 드라마가 제시하는 일상은 흡사 엄마들의 전쟁터를 연상케 한다. 아이들을 매개로 모인 다섯 여자의 이야기 < 이름을 잃어버린 여신 > 은 일본판 < 위기의 주부들 > 혹은 유치원 앞 다섯 엄마들의 '소프트 스릴러'다.
첩보 스릴러를 방불케 하는 마마토모의 삶
일본에선 최근 2~3년 '마마토모(ママ友)'란 말이 유행했다. 엄마를 의미하는 마마(ママ)와 친구를 뜻하는 토모(友)가 합쳐진 말이다. 결혼을 하면서 남자의 성을 따르고 주부로 살아가는 일본 여성들은 대부분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유일한 교우 관계를 맺는다. 나이가 비슷해 관심사가 비슷하고 아이의 양육, 교육 등 공유하는 문제들도 다수다. 드라마에서도 묘사되듯 마마토모는 아침 아이들의 등굣길에서 만나 티타임을 갖고 오후 아이들의 하굣길을 함께 하며 장을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녀를 사이에 둔 관계다. 그래서 트러블도 많다. 가볍게 말한 고민이 다음날 동네의 소문으로 퍼지고 배려가 시샘과 오해 속에서 악의로 바뀐다. 생활 정보지 < saita > 가 2010년 11월에 실시한 설문에 의하면 10명 중 6명의 20대 기혼 여성이 트러블 때문에 관계가 어긋난 마마토모가 있다고 답했다.
양육 정보지 < AERA with baby > 의 편집위원 이노쿠마 히로코는 "마마토모는 진짜 내 친구가 아니다"라고 했다. 애초 아이의 친구 엄마로 맺어진 사이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거리가 생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거리가 배신과 질투, 시기와 갈등을 낳는다. < 이름을 잃어버린 여신 > 에서 엄마들은 진심과 위선이 애매모호한 관계 속에서 악의 화신이 된다. 남편의 직장 내 성희롱으로 처지가 곤란해진 마마토모는 이웃집 아이를 유괴하려 하고, 빠듯한 집안 살림에 짜증이 난 마마토모는 윗집 엄마의 불륜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때로는 가깝고 때로는 먼 사이가 빚어낸 사건들이다. 드라마 < 울지 않기로 정한 날 > 에서 사내 여성들의 일상을 리얼하게 보여준 바 있는 프로듀서 오타 마사루, 각본 와타나베 치호 콤비는 < 이름을 잃어버린 여신 > 에서 마마토모의 지옥상을 현실감 있게 담아낸다.
내 아들의 친구 엄마는 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 이름을 잃어버린 여신 > 은 연출이 다소 과하다. 일상의 무대를 질곡의 드라마로 표현하기 위해 잦은 클로즈업과 공격적인 음악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는 마마토모가 갖는 미묘한 아킬레스건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이다. 친구와 마마토모 사이의 차이가 극화된 연출 속에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관계를 가짐에 있어 내외를 구분하는 일본인들의 태도는 암묵적이지만 명확하다. '본심과 명분(本音と建前)'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거리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자세도 다르다. 그래서 마마토모는 화근이 된다. 내외가 불명확한 관계는 본심과 명분의 끊임없는 오해를 낳는다. 마마토모는 가정주부, 학부모란 말로는 잴 수 없는 관계다. 내 아들의 친구 엄마는 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 이름을 잃어버린 여신 > 은 혼란에 빠진 일본 엄마들의 잔혹한 보고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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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재혁 자유기고가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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