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드라마보는 오후>/우리나라 드라마소식

[TV아웃] ‘천일의 약속’ 엿 먹어라, 시한부 인생!

▶김은영의 TV 아웃

SBS < 천일의 약속 >
< 천일의 약속 > 은 주인공을 냉정하게 쳐다보거나 손가락질하게 만든다.

시한부 인생 드라마들이 죽음을 다루는 전형적인 태도가 있다.

죽음의 그림자는 삶의 본질을 깨닫고 자아를 찾아 나서게 한다. < 천일의 약속 > (SBS)의 서연(수애)도 그렇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기 전의 서연은 가려진 존재였다. 따로 혼처가 있는 애인 지형(김래원)에게 서연은 통화기록이 삭제돼야 하는 여자였다. 자신과 동생의 생계를 꾸리는 동시에 고모(오미연)에게 빌린 전세자금을 갚아야 하는 빠듯한 살림은 신춘문예 등단 작가를 목돈 받고 남의 얘기를 지어주는 대필 작가로 주저앉혔다.

그러다 기억이 삭제되고 인격이 소멸되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 순간, 서연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기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지형의 결혼 계획을 알자마자 쿨하게 이별을 고했음에도 지형과 사랑했던 기억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서연은 자신의 인적사항, 흠모하는 작가들의 이름, 해야 할 일들, 집에 가는 길을 기록하고 복기한다.

이렇듯 전형적인 설정인데도 < 천일의 약속 > 이 주인공을 다루는 태도는 전형적이지 않다.

보통의 시한부 인생이라면 몰입과 연민을 유도하는 것이 상식인데, < 천일의 약속 > 은 주인공에게 정을 붙이기는커녕 냉정하게 쳐다보거나 손가락질하게 만든다. 서연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철없는 동생을 옆에 끼고, 내내 고생하다가 겨우 전세빚 갚고 팔자 펴나 했더니 알츠하이머의 날벼락을 맞은 인생이다.

그러나 빚에 허덕일지언정 외모는 완벽하게 갖춰야 하는 자존심, 동생 문권(박유환)의 걱정마저 매몰차게 뿌리치는 완벽주의는 가난한 시한부 인생에 대한 드라마 팬들의 보호본능을 정면으로 배반한다. 원치 않는 결혼 계획에 질질 끌려가다가 향기(정유미)와의 결혼식을 불과 이틀 앞두고 서연에게 도망치는 지형의 우유부단함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보는 이의 동정심을 거부하는 단호함은 드라마의 곳곳에 미친다.

가정의 화목에 집착하는 서연 고모, 지형과 향기 집안의 가정부들은 때때로 주인공 가족의 감시자처럼 묘사된다. < 인생은 아름다워 > (SBS)에서도 선보였던 정을영 감독의 장기, 창틀, 벽, 블라인드, 계단, 전깃줄 등 온갖 사물을 이용해 등장인물을 옥죄는 미장센김수현 작가의 꼬장꼬장한 필력과 맞물려 강박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결국 인간은 불치병에 걸리든 배신을 당하든 주어진 삶의 조건을 감당해야 하고, 남들이 훔쳐보든 뒷말을 하든 서로 부대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알츠하이머에 적응해야 하는 서연은 지형과의 추억을 곱씹을 여유가 없고, 화병으로 몸져누운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향기는 슬피 울 겨를이 없다. 불쌍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주인공들을 엄살떨지 말라며 다그치는 작가의 뚝심을 보노라면, < 천일의 약속 > 이 진짜로 엿 먹이고픈 것은 알츠하이머가 아니라 눈물 바람과 주인공 구명 운동으로 승부해 온 기존의 시한부 인생 드라마들이 아닐까 싶다.

http://zine.media.daum.net/movieweek/view.html?cateid=100000&cpid=215&newsid=20111123111006978&p=moviewe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