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만한 질문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4천 달러를 넘은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이제 2만 달러를 넘어섰다. 분배의 문제를 떠나서, 확실한 것은 그 시절보다 지금이 5배 행복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어떤 때는 더 불행해진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88만원 세대」로 절망의 시대를 사는 젊은 세대에게 위안을 주었던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에게 물었다. 왜 돈으로 행복을 사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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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공원은 콘크리트 덩어리 서울에도 숨 쉴 곳이 있구나, 하는 안도의 기쁨으로 다가왔다. 멀리서 우석훈 박사가 피크닉이라도 온 듯 잔디밭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인터뷰 촬영 때문에 포즈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학 박사라면 정갈한 슈트와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근사한 사무실의 마호가니 책상에 걸터앉아야 어울릴 것 같지만, 그는 달랐다. 신사복에 운동화를 신은 것도 그랬지만 인터뷰 내내 그가 선택한 언어들은 격의 없이 자유로웠다.
"요즘은 고양이를 돌보며 살아요. 내가 돌본다고는 하지만 녀석들이 나를 돌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덕분에 행복하니까요."
얼마 전 그는 「아날로그 사랑법」(상상너머)이라는 책을 냈다. 그 속에는 그동안 돌봐온 '길냥이'들과의 삶이 담겨 있었다. 또 결혼 9년 만에 지난해 얻은 아들의 보송보송한 사진도 실려 있다. 마당 고양이들을 호령하는 동거묘 '야옹구'와 제법 몸놀림이 자유로워진 아들. 이 두 '운명적 존재'가 서로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행복은 배가됐다. 행복하다면서도 주변 걱정을 했다. 다들 죽겠다고, 힘들다고 하는데 자신만 행복하니 미안하단다.
"고양이도 고양이지만 아이 덕분에 행복해졌어요. 하는 짓 보면 쥐어뜯고 환호하고(웃음). 사실 저는 20대 때는 무척 힘들었어요. 왜 사는지 몰랐고 30대 초반에는 약간 우울증도 있었어요. 사람들 만나는 걸 굉장히 싫어했거든요. 그때가 공식적으로는 커리어가 가장 화려했을 때였는데 말이에요. 국무총리실에 있을 때가 클라이맥스였는데 개인적으로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마흔 넘어서 보니 아무것도 안 하고 사니까 정말 편하더라고요. 아, 원래 사는 것이 이렇구나."
잘나가는 젊은 학자이자 능력 있는 연구원 시절이었다. 돈도 적잖이 벌어서 젊은 나이에 내집 마련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는 '왜 사는지, 공부는 왜 했는지'라는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게 힘든 30대 초반을 지나온 뒤 조직을 나왔고 결혼을 하게 됐다.
"행복에 대해서는 덜 먹고 덜 쓴다고 생각하고 나서는 무지 편해졌어요. 물질적인 욕구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절대 아니거든요. 1백억쯤 가진 사람들, 이른바 '슈퍼리치'라는 사람들도 행복하지 않고요. 그냥 마음속으로 뭔가 편한 것이 없을까, 하고 찾다가 고양이를 키우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인간은 누군가를 돌봐야 행복을 느끼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하는."
행복을 위해서는 대가 없는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그는 그것이 '돌봄'이라고 했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말이다.
"사랑을 하면 자꾸 소유하고 싶어져요. 혹은 이미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죠. 고양이들은 잘 죽어요. 아니면 길을 잃거나 집을 나가곤 해요. 그럼 되게 속상한데, 실은 속상할 필요가 없는 일이거든요. 걔는 그냥 자신의 삶을 산 거고 나는 그냥 돌봐주었을 뿐이지요. 고양이 밥 주고 똥 치워주는 것을 노동이라고 생각하면 힘든 일이지만 전 그거 하면서 재밌었거든요. 누가 누구를 돌본 건지, 사실은 잘 모르겠더라고요."
행복은 제 발로 온다
요즘처럼 내 맘 같지 않은 시절도 그는 고양이를 돌봄으로써 잘 넘길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미칠지도 모를 정도'였다는 대목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리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돌봄은 서로에게 행복을 나누어준다.
"흔히들 돈은 돈을 좇는 사람에게는 오지 않는다고 하죠. 돈이 가는 거지. 길게 보면 그 말이 대충 맞는 듯해요. 행복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행복해지지 않더라고요. 행복 또한 그냥 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파랑새와 같은 속성이거든요. 열심히 찾아다녀봐야 집에 있는 건데,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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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면 행복하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거든요.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더라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늘 세 끼 먹을 걱정이 없는 거면 그날은 편안한 거 아니에요? (현실에서도) 평생 세 끼 먹을 걱정 없이 살다 가면 행복한 삶이 아닐까 싶은데요. 물질적으로는 그 이상을 바랄 필요가 없다고 봐요."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성공을 위해 오늘 하루도 힘겹게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마냥 동조하기는 어려운 이야기다. 예전과는 달리 취직도 어렵고 사업을 해도 경제적 안정을 얻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경제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패러다임을 바꿔야지요. 지금보다 좀 더 자유롭게 해주고, 좀 더 허용해주면 좋겠어요. 그래야 사람이 가장 창조적으로 되는 상태가 되겠지요. 창조라는 것이 노는 사람한테만 허용된 특권인 거 같더라고요. '9 to 5' 하는 사람에게서 창조가 나오기란 굉장히 어렵죠. 창조적인 순간은 몇 초일 거 아니에요. 또 그 몇 초는 함수화되지 않을 거고요. 노는 사람들한테만 창조가 허락된 거다, 라고 생각하면 미래가 참 더러운 거예요. 계속 노는 사람들이 돈은 더 벌게 돼 있거든요."
요즘 회자되는 창조경제라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10년 전만 해도 화이트칼라가 더 오래갈 거라고 했다. 블루칼라가 하는 일은 자동화된 기계가 대신할 거라고. 그런데 이제는 화이트칼라가 하는 일도 상당 부분 전산화돼버렸다. 결국 산업이든, 예술이든 사람이 하는 창조의 영역이 남게 됐고, 그쪽으로 경제의 흐름이 옮아가는 당연한 결과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자유, 게으름, 여유, 돌봄 이런 것들. 다시 말하자면 2000년대에는 배부른 사람들의 가치였던 것이 최고의 가치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놀 수만은 없는 현실이 아닌가. 당장 오늘이 행복해야 행복한 것인데 말이다.
배고픈 놈은 먹고, 있는 놈은 내고
"욕심을 줄여야지요. 제가 한창 돈 잘 벌 때는 스피커를 사느라 돈을 많이 썼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하나도 안 샀거든요. 그런데 별로 불행해진 거 같지 않아요. 이사를 하고는 앰프에 손도 못 댔어요. 손봐둘 것도 많고, 몇 개 사야 할 것도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아이가 곧 망가뜨릴 건데 그걸 살 필요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요즘은 음악도 안 듣고 살거든요. 이제는 돈 생기면 아이 유모차에 씌울 거 사야겠다는 마음이 들지요(웃음)."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면 그저 버려도 될 욕심이 너무나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경제학자의 경제관념은 어떨까.
"살다 보면 같이 밥을 먹거나 할 때 돈을 써야 하잖아요. 그걸 꼭 n분의 1을 해야 하느냐, 연장자가 내야 하느냐 하는데, 배고픈 사람이 먹고 있는 놈이 내면 돼요. 예전에 현대차 CEO였던 분이 했던 얘기인데,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주는 사람은 교만하지 말고, 받는 사람은 비굴하지 말라는 그 말이 좋더라고요."
경제원칙은 50% 정도, 비경제적 원칙이나 비경제적 동기가 50% 정도인 나라가 선진국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은 경제원칙이 90~95%라 안타깝다고 했다. 즉, 모든 게 돈으로 설명이 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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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때문에 결정된 인간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눈을 의식한 행동 역시 행복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혀 명품에 열광하는 우리 젊은이들을 걱정했다. IMF 사태를 겪은 이후 우리의 삶의 기본 덕목이 돼버린 재테크. 최근에는 어린이 경제교육 열풍도 뜨겁다. 말이 경제교육이지, 돈 잘 벌고 잘 모으는 요령이라는 타이틀이 어쩌면 현실적이다.
"미친 짓이죠. 어린이에게는 많은 정보량이 중요해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동물도 직접 만져보고 해야죠. 그런데 그 시간에 경제교육을 하면 기회비용으로 봐도 아깝지 않나요? 어른이 되면 30분 만에 알 수 있는 건데, 그걸 여덟 살짜리 아이가 이해를 하려면…, 아니 당연히 이해를 못하죠. 그 시간에 마징가, 로봇 태권브이와 건담을 아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어요. 그건 우주에 대한 꿈이고 지구에 대한 사랑이잖아요. 전 절대로 어린이들에게 경제교육을 시키지 않을 겁니다."
이해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가 아니고 꿈이다. 그럼에도 아이들 경제교육에 민감한 이유 중의 하나는 엄마 스스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행복하지 않아서는 아닐까? 주부가 행복해지는 법을 물었다.
"남편이 한 축으로 같이 노력하지 않으면 주부 혼자 행복해질 수 없겠더라고요. 남편이 조금이라도 가사에 참여하고, 늦게 들어오더라도 시간을 내서 아이들하고 얘기를 해야 하고요. 자신도 힘들게 일했겠지만 하루 종일 고생한 아내에게 남편이 '수고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이 되면 행복해질 수 있는 거 같아요."
좀 더 구체적으로는 주말에 한 끼 정도는 부부가 함께 만들기를 조언했다. 이를 위해 주중에 상의를 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한 순간을 만들려고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나머지는 장식품이 돼버린다고 했다. 맞벌이든 아니든 부부 사이에 공통의 언어, 공통의 이해를 만들지 못하면 뭘 하든 불행할 것이라고 했다. 부부간의 이해가 부족하니, 엄마들이 자식에게 지나치게 집착해서 '헬리콥터 맘' 같은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내는 조금 비싸더라도 분위기 좋은 곳에서 차 한 잔 마시고 싶은데 남편은 삼겹살이나 먹자고 하고…. 그런 부분이 맞춰가기 위해서는 서로 조금씩 노력해야 하거든요. 남편 스스로 조금씩 여성화되는 걸 감당하고 노력할 때 집안이 평온할 거예요. 아이들과도 마찬가지예요. 시간이 없는 건 알겠어요. 그렇다고 대화까지 안 할 필요는 없잖아요. 평소 대화가 없으니 다들 거실에서 잘 놀고 있다가도 아빠가 집에 오는 소리만 들리면 황급히 TV를 끄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지요. 남자들이 더 노력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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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계획 없어요. 쓰기로 한 책이 몇 권 있어서 일단 책은 쓰려고 하고요. 영화를 더 할지, 아니면 조금 편하게 별거 안 하고 있을지는 아직…. 요즘은 루틴하게 살아요. 아침에 눈뜨면 평일에는 아침 방송 하고, 주말에는 놀아야지!(웃음) 꼬질꼬질하게 보내려고요."
김진세 박사는…
여자보다 여자 마음을 더 잘 아는 여성심리전문가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에서 일상의 스트레스에 지친 이들을 위한 상담을 하는 한편, '행복연구소 해피언스'를 통해 기업체를 대상으로 임직원의 스트레스 관리와 행복 찾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행복 멘토'라 불리고 있다. 2008년 1월호부터 3년간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을 통해 서른여섯 명의 긍정 아이콘을 만나 그들이 가진 긍정의 힘과 행복 노하우를 독자들과 공유해왔다. 저서로는 「마흔의 심리학」(공저), 역서 「뜨겁게 사랑하거나 쿨하게 떠나거나」, 「심리학 초콜릿」, 「스타트 신드롬」, 「애티튜드」가 있다. 트위터 @happy_mentor
우석훈 박사는…
파리10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이른바 출세 가도를 달렸다. 대기업 산하 연구원, 국무총리실, 에너지관리공단을 거쳐 유엔 기후변화협약의 정책분과의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던 해로 꼽는 2005년부터 자칭 C급 경제학자로 다방면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 시대의 산물이 된 「88만원 세대」를 비롯해 스무 권이 훨씬 넘는 책을 쓰고, 강의를 하고, 정치의 뜨거운 현장에 섰으며, 방송을 하고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요즘은 SBS CNBC '집중분석 takE'에 출연 중이다.
<■기획 & 진행 / 장회정 기자 ■글 / 김진세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http://media.daum.net/zine/ladykh/newsview?newsid=201306101737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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