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아역 배우 갈소원양의 할머니 조은일 작가
아이를 키우며 매 순간 느꼈던 환희와 행복, 아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자녀교육을 둘러싼 수많은 생각과 한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담은 책을 펴내며 많은 '엄마'와 '여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던 조은일 작가. 훌륭하게 자란 손녀 갈소원양을 만나며 또다시 숱한 깨달음으로 한 세대의 일대기를 완성해나가고 있다는 조은일 작가가 매달 소소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귀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달에는 손녀를 향한 염원을 풀어놓았다.
|
그런데 다소 노령 산모에 속하는 네 엄마는 그때 서른다섯 즈음이었는데(숫자가 뭬 그리 중요하겠니?), 산달이 가까워지자 병원에서 느닷없이 제왕절개를 해야겠다는 거야.
제왕절개. 여기에 이 할미가 또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은지. 그놈의 제왕절개가 무슨 경제력 과시쯤으로 유행하는 빌어먹을 한국의 세태에 대해서 진작부터 흥분하던 할미다. 할미는 제왕절개라고 하면 '의사 측이나 산모 측이나 모두 골빈당 같으니라고'라고 생각했었거든. 세계적인 '출생의 비밀'을 보자면 제왕절개를 하는 산모의 수가 세계 1, 2위를 다투는 곳이 한국이라고 하더구나.
당시는 제왕절개의 효용에 대해 겨우 생각해보고 반성하던 시기였다. 어쨌든 할미가 네 엄마를 담당한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고 이모저모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어쩔 수 없이 너를 제왕절개로 꺼내기로 결정했단다.
흐흐흐~ 그래서 어떻게 됐는 줄 아느냐? 기왕지사 제왕절개를 하는 거라면 하루 이틀쯤은 우리 마음대로 날짜나 시간을 융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급기야 서두르기까지 했다. 철학관에서 좋은 날짜와 시간을 받는 일. 쉽게 말하면 점치기요, 어렵게 풀자면 사주팔자 역학인데…. 사실 이는 인류의 통계학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확률을 연구하는 학문에 가깝지. 과학자도 있고, 천문학자도 있듯이 인생 역학은 통계학이라고나 할까?
예를 들자면, 나에게도 저절로 알게 된 길흉의 날짜가 있더란 말이지. 계절의 여왕인 5월(초)에 결혼한 할미는 매년 그날이면 비가 온다는 사실을 자동으로 알게 됐어. 결혼식 당일에 내린 비는 가히 잊을 수 없는 폭우였다. 모든 하객은 나의 결혼식은 기억을 못해도 그날의 비는 기억할 정도가 됐지. 그러더니 해마다 거의 비가 왔다. 그러니까 5월 초만 가지고 연구한 나는 그날은 비가 온다는 확신이 있단다.
즉, 이런 것들의 집합이 이른바 '날짜를 잡는다'는 철학관의 통계가 되겠기에 기왕이면 좋은 날짜를 잡아서 너를 꺼내기로 한 거야(독자 여러분께-따라 하지 마세요^^). 극성이 부족한 이 할미가 너의 출생일을 잡는 데는 나답지 않은 최선을 다했다는 이야기지. 너를 향한 나의 거룩한 염원은 이렇게 깊었단다.
이런 말이 있지. '한 인간을 이상적인 인물로 길러내기까지는 삼대(三代)가 걸린다'. 삼대의 정성과 염원을 담아야 되는 이상적 인물의 탄생. 소원아!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란다. 지금부터 들려주는 이 할미의 비밀은 아무도 모른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내 마음속에 그리던 한 생명의 탄생에 대한 기원 말이다. 인생을 좀 살아본 자가 염원한 이상형.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보신 관객들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너에게 빠졌지. 왜 그럴까? 네가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어려서일까? 이 할미는 이런 단순한 이유들을 넘어선 너의 어떤 매력 때문일 거라 생각한단다. 자고로 손에 잡히는 명확한 물체보다는 잡을 수 없는 그 무언가를 표현하는 게 쉽지 않다. 또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야말로 진정 소중한 것이지.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반대로 살아가고 있지. 잡을 수 있는 것에 연연하면서,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모르면서 말이다.
너의 목소리,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너의 청아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담긴 천진함, 순수함, 교양 같은 것들(이 할미는 늘 말한다. 네 살짜리 아이도 그 나이에 맞는 성숙함이 있어야 한다고). 누가 들으면 굉장히 엄하다고 느끼겠군. 도대체 엄격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이 할미인데 말이다.
네 목소리에 대한, 할미가 생각하는 기원을 말해주고 싶다. 저 먼 과거로부터 말이지. 할미는 말이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을 아주 좋아해. 스스로 정성을 다하고, 하늘이 내리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너의 목소리에 대한 나의 기원은 네가 잉태도 되기 수십 년 전 그러니까 너의 엄마, 삼촌, 이모 이렇게 삼남매의 청춘 시절부터란다.
네 외삼촌은 많이 아팠단다. 우리 집안의 풀 수 없는 아픔이었고, 수수께끼였지. 그 삼촌 때문에 한국의 류머티즘 박사님들 중 소통을 안 한 분이 없었다. 그때 미국에서 막 귀국하신 한양대 김성윤 박사님 댁으로 전화를 넣었었다. 부재중이시라 직접 통화는 못했는데 그때 전화를 받은 천상의 목소리. 아마도 다섯 살 즈음으로 생각되는 여자아이였다. 벌써 20년은 족히 넘었을 그날 소녀의 목소리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이후 잊히지 않는 나의 멘토가 됐다는 것을. 그 어린 목소리에는 놀랍게도 내가 상상하던 훌륭한 집안의 가풍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름의 성숙함, 예의 바름, 총명함 같은 것들. 단 몇 초의 음성이 남긴 감동이었다. 그때부터 아마 나는 막연히 '목소리'에 담긴 사람의 인격을 생각해보게 됐고, 지금까지 하나의 이상이 됐던 것이다. 그때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는 망연히 앉아 '기도'했다. 막연하고도 간절한 기원이었다. 저런 아이가 태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삼대가 걸린다는, 삼대의 정성이 필요하다는 바로 그 이야기도 떠올랐단다. 사실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하려면 삼대가 서울에 살아야 한다. 표준 영어를 쓰려면 삼대가 영국 런던에서, 미국의 표준어를 쓰려면 삼대가 미국의 뉴욕에서 거주해야 한다. 목소리 하나에 함축된, 태생적인 근본에서 교육(양육)에 이르기까지 이상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심오함에 깊이 빠져보는 시간이었다.
이후 노력을 많이 했지. 네가 자라면서 너의 귀여움은 생김새를 능가하는 목소리나 억양에서 점점 더 발현됐고, 이 때문에 그만 모든 이들이 기절하곤 했다. 정말이야, 너를 대하면 모두들 기절했다고. 무척 귀여워서 말이야.
이야기가 잠시 여기저기로 튕겨가는구나. 결국 이 할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렇게 이것저것 많은 요소가 함께 실행돼야만 하나의 이상적인 사람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엄마가 배 속에 아기를 담고 태교를 하듯이 그 태교 이전의 보이지 않는 환경 조건과 생명의 탄생에서 육아에 이르기까지, 존귀하지 않을 수 없는 성장의 과정.
이 할미는, 자만이 아니라 너의 탄생에서 육아까지, 이토록 아기자기하고 한없이 경이로운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언제나 가족이 모두 참여했단다.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최첨단의 IT기기와 통신 등 문명의 이기 덕분에 가족이 번갈아 여기저기 나가 있거나 떨어져 있어도 실시간 함께할 수 있었다. 이즈음 할미는 나의 존재가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건강해야 되겠다. 그리고 너를 기르는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
세 아이를 키우며 겪었던 다채로운 이야기를 엮은 에세이 「빵점엄마 백점일기」를 쓴 베스트셀러 작가. 때로는 편안한 친구 같고 때로는 든든한 동반자 같은 두 딸과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면서도 늘 밝고 유머러스한 아들의 엄마로 살아오면서 지혜와 성숙을 배웠고, 국내 최초로 홍대 앞에서 북카페를 운영할 정도로 빛나는 감각과 자유로운 감성을 지녔다. 1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7번방의 선물'의 아역 스타 갈소원양의 외할머니로, 자녀들에게 그랬듯 소원양 또한 자유롭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보살펴왔다. 「빵점엄마 백점일기 1, 2, 3」 외에도 「가끔은 원시인처럼 살자」, 「항동에 냉이꽃이 필까」, 「작고 단단한 행복」 등의 책을 펴냈다.
<■기획 / 이연우 기자 ■글 & 사진 제공 / 조은일 ■사진 / 조민정>
http://media.daum.net/zine/ladykh/newsview?newsid=20130813172116176
'<드라마보는 오후> >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뜻한 이웃들의 이야기]청소년 재능 기부 단체 이끄는 서다영·조영선양 (0) | 2013.09.15 |
---|---|
한국인이 좋아하는 섬 베스트 7 (0) | 2013.09.15 |
도심에서 가볍게 즐기는 워터파크 (0) | 2013.08.07 |
해안절경 볼 수 있는 추천 여행지 4곳 (0) | 2013.07.31 |
누구나 책갈피에 시를 쓰던 시대 (0) | 2013.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