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강좌의 대미를 장식한 주인공은 하지현 박사다. 정신과 전문의로 사춘기 아이들을 두루 만나온 그는 1년에 250권 이상의 책을 읽는 다독가이자, 책 한 권을 통상 3개월 안에 쓰는 '파워라이터'로도 유명하다.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는 자신의 책 제목대로, '빈틈 있는' 육아를 강조한 그의 강연을 지상 중계한다. 네 번에 걸쳐 마무리된 사춘기 강좌를 동영상으로 다시 만나보고 싶은 이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홈페이지(noworry.kr)에 접속하면 된다.
사춘기 마지막 강의인 만큼 구체적 얘기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실제로 많은 부모님이 구체적인 것들을 궁금해한다. '용돈을 얼마나 줘야 하나?' '귀가 시간은 몇 시로 해야 하나?' 등등. 그런데 원론적으로 그 답은 집집마다, 엄마 아빠의 성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어느 부모든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은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 점점 더 불안하고 힘들어진다는 점인 것 같다. 이런 걸 주변에서 보고 접한 젊은 세대는 아이 낳기를 포기하고, 그러다 보니 합계 출산율 1.19명으로 대한민국이 소멸하게 생겼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왜 이렇게 불안하고 힘들까? 지금의 부모 세대는, 낯설고 익숙하지 않으면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사고에 익숙하다. 김연아도 1000번, 2000번 피나는 연습을 했기에 트리플 액셀에 성공하지 않았느냐는 식이다. 요즘은 (육아를) 공부하는 아빠들도 많다. 열심히 공부해서 많이 알게 되면 아이가 따라올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가 뭔가를 많이 시도해보고 뭔가를 많이 쥐고 있으면 덜 불안해질 거라는 게, 지금까지 부모 세대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물론 30~40년 살다 보면 일정 부분은 포기하는 데 익숙해진다. 탐은 나지만 고급 외제차가 없어도, 장동건이 내 남편이 아니어도 사는 데 지장 없으니 괜찮다는 식이다(웃음).
↑ ⓒ시사IN 신선영 : 하지현 박사는 신경정신과 전문의로 사춘기 아이들을 두루 만나왔다.그런데 아이에 대해서만은 정반대 상황이 벌어진다. 아이는 자랄수록 놓아줘야 하는 존재다. 아이 키우기가 '풋잇고(put it go:밀어붙이기)'가 아닌 '렛잇고(let it go:가게 놔두기)'인 까닭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이전까지는 아이를 내 손에 쥐고 있었더라도 사춘기 이후로는 아이가 내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이때 느끼게 되는 불안이 굉장히 색다르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불안이다. 비견하자면 애인이 나를 떠나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충격 정도? 그런데 이 같은 사건은 어쩌다 한번 겪지 서서히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부모들이 '매번 견디기 힘들게 아프다'고 호소하곤 한다. 아직 맷집이 생기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가 매번 상상도 못했던 일을 저지르며 부모 뒤통수를 치니까.
이는 자연스러운 불안함이다. 부모가 약해서 불안한 게 아니다. 이걸 인정하면 좀 쉬워진다. 그런데 끝내 불안을 못 견디고 아이를 쥐고 있으려는 분들이 있다. 아이가 6학년이 됐는데 혼자 버스 타고 어디 가는 꼴을 못 본다. 물 좀 먹고 풀에 빠져도 봐야 수영을 배울 텐데 다 큰 애에게 튜브를 끼워준다. 내가 불안하니 아이한테 모든 걸 미리 다해주겠다는, 이른바 헬리콥터 맘이다.
사춘기가 되면 아이는 어느새 각성을 한다. '나는 나야' '나는 나여야 해'라는. 그 전까지는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어 칭찬받는 게 최고였다면, 이제부터는 엄마 아빠의 아들딸이 아닌 '나로서의 나'를 만드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가 계속 아이를 쥐려 한다? 결국 싸움이 벌어지게 돼 있다. 부모가 기운이 강해서 아이를 압도할 수는 있다. 이럴 경우 스물여덟아홉 살이 돼 뒤늦게 문제가 터진다. 멀쩡한 직장 다니다 때려치우는 식으로. 이른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다닌다는 애들 중 군대 다녀와 갑자기 나가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제부터 외국 가서 박사 따고 해야 할 애가 당구장·PC방에 묻혀 사니 부모는 미칠 노릇이다. 그런데 아이는 아이대로 다 타버린 상태, 너무 지쳐서 머리가 정지해버린 상태가 된 거다. 요즘 아이들은 6~7세부터 공부 경쟁에 내몰린다. 그때부터 달려줘야 소위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으니까. 그러다 보니 모터가 너무 빨리 닳아서 부모 세대가 40대에나 겪을 상태를 아이들이 20대에 이미 경험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20년 가까이를 사춘기로 보내는 아이들
↑ ⓒ연합뉴스 : 한 중학교 졸업생이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다. 부모들은 이를 일탈 행위로 보지만 학생들에게는 또래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는 과정이기도 하다.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힘들어하면서도 불안을 쥐고 사는 걸까. 나는 '평균'과 '보통'의 기준이 지나치게 올라가 있는 데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한 경제신문이 '금융자산이 얼마쯤이어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벌인 일이 있다. 조사 결과 10억원 이상은 돼야 중산층이라 할 수 있다는 응답이 44%에 달했다. 그런데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이 정도 금융자산을 가진 사람은 전체 인구의 2.4%에 불과하다. 이렇게 높은 기준을 설정해놓고 스스로 불안해하는 거다.
평균에 대한 기준치가 올라가면 삶의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아이가 상위 1%가 될 수는 없는데도 그 기준에 아이를 맞춰야 한다고 동동거린다. 나는 한국 사교육 열풍을 조장하는 최악의 원흉은 오전 10~12시에 진행되는 엄마들의 '티타임'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 학교 보내놓고 커피 한잔 하자는 명목으로 모여 '누구는 이거 한다는데 너는 왜 안 하니?'라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불안하게 한다. 사실은 각자의 정보를 100% 오픈하는 것도 아니면서. 불안장애가 있는 엄마들의 경우 나는 티타임 모임부터 끊으라고 조언한다. 차라리 왕따가 되는 게 훨씬 낫다. 부모는 아이에게 우산이 돼줘야 한다. 부모나 아이나 바깥세상의 기준이 높다는 건 잘 안다. 그래도 아이들이 밖에서 비를 맞을 때는 그 비를 다 맞게 해서는 안 된다. 부모가 우산이 되어 그 비를, 그 불안을 막아줘야 한다. 그런데 어떤 부모는 아이 혼자 그 비를 다 맞게 한다. 이 학원 저 학원 뺑뺑이를 돌리면서, 자기가 가진 불안을 아이에게 쏟는 것이다.
불안하다 보면 짜증이 나게 된다. '나는 이렇게 노력하는데 아이는 왜 저럴까' 싶어 이것저것 다 때려치우고 훌쩍 떠났으면 좋겠다고 상상한다. 전업주부나 일하는 엄마나 마찬가지다. 짜증이 나면 당연히 아이한테 화를 내게 된다. 그런데 화를 내고 후련해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부분이 후회한다. 아이가 잘못한 만큼 혼을 낸 것이 아니라 내가 화난 만큼 아이에게 감정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화장실 물이 수챗구멍으로 흘러가듯, 감정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게 돼 있다. 귀신같이 만만한 데를 골라 흘러간다.
다음은 사춘기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특성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다. 보통 사춘기 하면 1318을 떠올리지만, 요즘은 아니다. 생물학적인 성숙은 과거보다 일찍 시작되는데 사회심리적인 성숙, 곧 '독립된 1인'이라 말할 수 있는 나이는 점점 늦춰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4~5학년부터 시작해 스물일고여덟 살까지, 거의 20년 가까운 기간을 사춘기로 보내게 되는 셈이다. 이 시기, 몸이 빠르게 발달하는 데 비해 뇌의 발달 속도는 늦다. 미래나 시간에 대한 관념도 없고, 추상적 사고도 안 된다. 부모 처지에선 중1부터 대학 입시까지 6년이 금방이지만, 아이에게 6년은 한없이 먼 미래일 뿐이다. 이렇게 추상적 사고의 발달은 더딘데 호르몬은 마구 분출된다. 비유하자면 컨트롤이 안 되는 신인 투수랄까. 이제 막 힘이 생겨 시속 160㎞짜리 강속구를 던져대는데, 이게 어디로 날아갈지 아무도 모른다. 엄마한테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놓고 저 혼자 놀란다. '내게서 이런 큰 소리가 나다니' 하면서.
사춘기 아이들의 감정은 앞뒤로 움직인다. 평소에는 99% 괜찮은 아이인데, 숨어 있던 1%가 전면에 등장할 때가 있다. 평소에는 공부만 하는 배너 박사였다가 어느 순간 헐크가 된다고 이해하면 된다. 이때 아이들이 보이는 눈빛은 거리에서 만난 미친 사람과 똑같다. 100% 날것의 공격성을 드러낸다. 이럴 때는 조심해야 한다. 다만 이런 상황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보통은 5~10분이면 사라진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의연히 대처하면 된다. 그런데 이걸 못 견디고 '애를 죽도록 팼다'는 아빠들이 많다. 그 눈빛에 놀라 순간 '어른 대 어른의 싸움'으로 맞받아친 거다. 반대로 1%에 놀라 물러서는 부모도 있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이게 통하네?' 싶어 괴물로 변하기 시작한다. 등교 거부, 용돈 갈취, 엄마 폭행 등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부모가 협상해야 할 대상은 아이의 99%이지 1%가 아니다. 아이가 1%를 내보인다 해서 얻어갈 건 없음을 분명히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다.
또래 집단이 중요한 것 또한 사춘기 아이들의 특성이다. 아이들이 '노스페이스'를 교복처럼 입고 다니고 졸업식 날 떼 지어 일탈 행위를 보이는 것 또한 또래 집단에 소속되는 것이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부모 말보다 친구 말을 훨씬 더 믿는 것도 이 시기다. 사춘기에는 반항도 극심해져서 금지된 선을 자꾸 넘으려 한다. 해운대나 강릉에 가보면 해안에 안전선을 쳐놓았는데도, 자꾸 그 경계를 넘나들며 노는 아이들이 있지 않나. 사춘기 아이들이 꼭 그렇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보니 전기 철조망이 둘러쳐진 농장에서 젊은 황소들이 일부러 철조망 가까이 가서 부딪치는 장면이 나오더라. 짐승이나 사람이나 그 시기에는 똑같다(웃음).
아이들이 자꾸 금지된 선을 넘는 것은 그것이 부모가 만들어놓은 선이기 때문이다. 오늘 비가 오니 우산을 갖고 가라면 그냥 나가버리는 게 사춘기 아이들이다. 그냥 엄마가 하라니까 싫은 것이다. 그런 만큼 부모는 좀 정치적일 필요가 있다. 차악 내지 차선일지라도 최악이 아닌 한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부모가 적당히 틀린 답을 얘기할 때도 있어야 한다. 아이가 보기에 부모는 나름 완벽한 사람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아이는 '내 인생의 성적표'가 아니다
사실 모든 걸 빈틈없이 해내는 완벽한 부모는 아이에겐 재앙일 수 있다. 유명한 천재 예술가의 2세 중 잘된 경우가 별로 없다는 건 상징적이다. 지금 부모 세대의 90% 이상은 자신의 부모보다 많이 성취하고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이 우리 나이가 됐을 때 과연 우리보다 잘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걸 우리 스스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모든 것이 확장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사회는 너무 촘촘해져 있다. 자본 축적도 어렵고, 사는 것도 힘들다. 이런 세대적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아이들 세대에도 최상위 1%는 존재할 것이다. 부동산 값이 다 휘청거려도 강남 아파트 값은 끄떡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만 우리 애가 지금 동네 야구를 하는 수준이라면 언젠가 프로야구 1번 타자가 될 거라고 헛된 기대는 하지 말자. 적당히 투자하고, 남은 에너지는 나의 노후, 그리고 지금의 행복을 위해 쓰자. 어떤 부모는 '우리 아이가 어느 순간 대오각성해 저 반열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하던데 착각 마시라. 그런 아이가 워낙 드물기에 뉴스에 나오는 거다(웃음).
결국 좋은 부모란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부모,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균형감각을 가진 부모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가 잘되면 고맙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부모가 망가질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내 삶이 즐거운 게 먼저고, 내 성취가 먼저다. 그런데도 많은 부모들은 아이가 잘돼야 나도 잘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일종의 '확장된 자아'이자 '내 인생의 성적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이가 10대가 되면 '뭘 더 해줄까'가 아닌 '뭘 더 안 해줄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럴 때 도리어 아이에게 자기 세계가 열린다. '부모한테 비빌 생각 말라' '각자 잘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갖게 하면 아이가 더 정신을 바짝 차린다. 죄책감에 마음 졸이지 말고 내 인생의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게 훨씬 중요함을 기억하셨으면 한다.
정리·김은남 기자
하지현 (건국대병원 신경정신과 의사)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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