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사진전 <이 사진들은 많은 자료에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을 모은 것으로서
교육적 가치와 역사적인 민족의 기록으로서 보전 할 가치가 있는 것
들임으로 많이 활용들 하시고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홍지문은 한북문이라고도 하는데, 인왕산 뒷 편 끝자락에 있는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홍지문 문루와 오른쪽의 홍지문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풍속 사진. ‘조선 풍속’엽서에 실린 사진 중 상당수는 스튜디오에서 조선인 모델을 고용해 찍은 것으로 추측된다. 무대 배경에는 서구식 장식물이 등장하고 조선인 모델들은 촬영자의 의도에 맞게 연출되어 풍속 이미지로 팔려나갔다. 회식(우편엽서)
숭실학교 학생들
서광범
국민소학독본
이 사진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풍속 사진엽서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엽서는 관광 기념용 사진엽서 가운데 한 장이며,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널리 유통되었던 '상품'이다. 죄인들(우편엽서)
혜화문과 성곽
서울 60리 둘레를 현무도의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호위하고 있는 한양의 도성은 애초 남산과 북악산을 제외하고는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 이것을 세종이 모두 돌로 쌓았으니, 연 인원 32만 2,400명이 동원되어 98일만에 완성을 보았다.대규모 인력 동원을 통한 단기의 공사였다. 옛 법도대로 따르자면 성곽은 사각형 모양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양의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짓다보니 굽이굽이 산성이 되어 물결쳤다. 성곽의 기본 출입문은 동·서·남 ·북의 4대문이었으나, 이외에도 4소문과 그 밖의 여러 문이 있었다. 4소문은 혜화문·창의문·소의문·광희문이다. 그 가운데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 시체가 나가는 문)으로 불려졌다. 조선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는 반드시 서쪽은 서소문으로, 동쪽은 광희문으로 나가게 하고, 다른 문으로는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시구문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수구문이라는 명칭은 청계천이 수문 근처를 통해 성 밖으로 흘러나가고, 남산의 물이 광희문 부근을 통과하여 나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에서는 콜레라 등의 전염병이 유행하면 환자들을 광희문 밖에 내다 버리곤 하였다. 이에 시골 사람들은 “한양에 가거든 수구문 돌담의 돌가루를 긁어 오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광희문 밖 돌가루가 병마를 물리치는데 효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광희문이란 이름보다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 불렀다. 그리고 ‘못된 바람은 시구문으로 분다’는 말도 있었다. 또 다 죽게 된 사람을 ‘시구문 차례’라고 했으니, 양반은 물론 보통 사람도 이 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도성(인왕산 곡성)
1890년대 보신각
윤치호
박영효와 윤치호
마패
남대문(숭례문)
궁녀
경복궁과 육조거리
숭례문(남대문)
왼쪽부터 영친왕.순종.고종.귀비엄씨.덕혜옹주. 이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각자이자 흥완군(대원군의 형)의 손자인 고 이해선(순종의 육촌 형제, 민영환의 사위) 선생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출처 :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구한말 고종,순종,영친왕..구한말 황실
육상궁(毓祥宮)은 원래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봉사하는 사당이었다. 1908년에 저경궁 · 대빈궁 · 연우궁 · 선희궁 · 경우궁이 합사되어 6궁으로 불렸으며, 1929년에 덕안궁이 경내로 옮겨와 7궁이 되었다. 육상궁
조선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이 된 후 거처하던 곳이다. 영조가 감고당 편액을 내렸고, 명성황후가 책봉되기 이전에 거처하기도 하였다. 감고당(感古堂, 현 안국동 덕성여고 자리)
전란 등 비상시 왕이 거처하기 위해 지은 행궁이다. 북한산성 행궁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 현재의 서울대학교 병원자리 .. 경모궁의 일부
창덕궁
경운궁(덕수궁)
1892 창경궁과 홍화문
서울 - 천변(川邊)마을
뒤에 보이는 다리가 수표교.
서울은 지형적으로 북쪽에 산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 하천들은 도심을 흘러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성 안을 흐르는 하천들은 청계천을 비롯하여 중학천 등이 있었다. 서울 - 청계천에서 빨래하는 여인들
1940.01.01 일장기를 제호 위에 올리고 일황부부사진을 실은 조선일보 신년호
1907 윤치호가 쓴 애국가
이토 히로부미(왼쪽)와 한국 주재 일본군 사령관(오른쪽) 1905.11.29 경성역 - 일본정부 칙사로 조선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
포도청은 1895년 경무청이 설치될 때까지 조선왕조에 경찰기관이다. 1890 포도대장
한말 훈장과 학동들
한말 대구 - 서문시장
한말 서울 소공동 - 사진관
한말 서울 - 싸전거리
한말 인력거
1909 전주 - 신흥학교 수업 광경,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대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명성황후의 시신이 홍농 장지로 떠나기 전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기념촬영한 것이다. 1899 슬픔에 잠긴 고종황제
강화도 초지진 포대
1876 전차에 오르는 승객들
장춘단 장충단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순절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이하 왕실을 위해 충절을 바친 여러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제사단이다. 1908년 일제는 제사를 폐지시키고 이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었다
어가행렬
융희 2년(1908) 장충단에서 거행되었다. 가운데 좌우로 서있는 사람은 조희연(趙羲淵)과 김윤식(金允植). 1908 갑신정변 을미사변 관련 희생자 추도회
마지막 황제 순종과 대신들
1902 고종의 칙명
원구단 일대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짐꾼들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지게로 옹기를 나르는 사람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지게로 옹기를 나르는 사람
1904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정공 민영환의
컬러 유리원판 사진. 출처 : 정성길 화성테마박물관장 1904 민영환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젖을 먹이고있는 여인들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출처 :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 양반댁마님과 가마꾼
출처 :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 서당의 서동들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상류층 부인을 태운 가마
출처 :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 상류부인과 규수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빨래터에 가는 여인과 아이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물지게꾼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목재를 파는 소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목재를 나르는 소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에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떡 만드는 사람들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오라버니에게 심신의 아픔을 절절히 적어 보낸
명성황후의 편지 두 통. 청나라제 예쁜 색지에는 대나무와 꽃이, 편지 봉투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다. 1874 명성황후의 편지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돼지 팔러가는 사람들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돼지 팔러가는 사람
출처 : J.Z.Moore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10 평양부근 - 길 옆의 칠성당 출처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서울 신사들
1908~10 서울 - 짐꾼들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서울 - 승려들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상여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한양 - 주민들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한양 - 짐꾼들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빨래터
1907 원구단과 황궁우
1899년에 여러 신위를 모시기 위하여 원구단의 북쪽에 지은 8각 3층의 건축물이다. 지금은 소공동 조선호텔 뒤에 있으며, 사적 157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궁우
고종이 1897년에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던 원구단은 1913년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원구단의 정자
조선여인(우편엽서)
1903 조선여인(우편엽서
광희문(시구문) 밖
도성 동남쪽에 위치한 4소문의 하나이다. 문의 좌우 성벽은 일제 때 헐렸다가 1975년 남쪽으로 15m 옮겨져 복원되었다. 1892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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