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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시간

[스크랩] 몽실언니 발제중(펌)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1996)》에서

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

  1937년 9월에 나는 일본 도쿄 혼마치(本町)의 헌옷장수집 뒷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동무했던 아이들과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늘 외톨일 골목길에서 지내야 했다. 삯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는 저녁때면 5전짜리 동전을 주면서 심부름을 시켰다. 이때 나는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키도 작고 손도 조그만 히데코 누나는 항상 말이 없고 외로워 보였다. 함께 극장에 가면 고구마튀김을 수건에다 겹겹이 싸서 식지 않도록 품속에 넣어뒀다가 영화가 중간쯤 진행될 때 꺼내어 내 손을 더듬어 쥐어주던 그 따뜻한 촉감은 평생을 잊을 수 없다.

   아무렇게나 흘러들어와 모여 사는 빈민가 사람들의 가족구성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골목길 끄트머리 노리코네 아버지는 조선사람, 어머니는 일본여자, 노리코는 고아원에서 데려온 딸이었다. 건너편 집의 미치코는 주워다 키운 아이고 동생 기미코는 조선아버지와 일본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고 우리 앞집 일본인 부부도 양딸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한집 건너 경순이는 관동지진 때 부모를 잃고 거기서 식모살이처럼 얹혀살고 있었다.

   경순이는 가끔 얻어맞아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우리집으로 쫓겨 왔다. 어머니는 어루만져 달래주고 밥을 먹이고 재워줬다. 경순이에 대한 추억은 이따금 아직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스무살이 넘었을 것이라 했지만 경순이는 제 나이가 몇 살인지 몰랐다. 오테다마(팥주머니)를 만들자면 보통 팥알을 넣는데 경순이는 그럴 수 없어 우리집 추녀밑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만들어진 자잘한 돌멩이를 골라 만들곤 했다.

   소설 《몽실언니》는 혼마치에 살았던 히데코 누나이기도 하고 경순이 누나이기도 하고 그 외의 가엾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1946년 해방(9세) 이듬해 우리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때, 조선인연맹에 가입했던 형님 두분은 다음에 돌아오기로 했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울타리의 동백꽃이 피던 3월에 후지오카의 버스정류장에서 나는 차에 오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끝내 떼밀려 태워졌고 차는 떠나고 말았다. 만 8년 6개월 동안 어렵지만 정들어 자라온 땅을 떠난다는 것은 가슴이 쓰리고 서러운 일이었다.

   1946년 4월은 보릿고개가 심했다. 거듭된 흉년으로 웬만한 집 모두가 쑥과 송피로 죽을 끓여 먹고 있었다. 그것도 하루 세끼 먹는 집은 드물었다. 만주와 일본에 갔던 동포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당장 거처할 집이 없는 우리 식구는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와 동생과 나는 외가가 있는 청송으로 갔고 아버지와 누나는 안동으로 갔다. 함께 모인 것은 47년 12월이었다.

   나는 국민학교를 네 군데 다녔다. 도쿄의 혼마치에서 8개월, 군마켕에서 8개월, 조선에 와서 청송에서 5개월, 그리고 나머지는 안동에서 졸업을 했다. 그것도 잇따라 다닌 것이 아니라 몇 달씩 몇 년씩 쉬었다가 다니는 바람에 1956년(19세) 3월에야 겨우 졸업을 했다.

   아버지의 소작농사만으로는 월사금을 못 내어 어머니가 행상을 하셨다. 한달에 여섯 번씩 가시는데 장날 갔다가 다음 장날 돌아왔다. 그러니 자연히 밥짓는 일은 내가 맡아야 했다. 아침밥을 지어먹고 설거지하고 학교 가자면 바쁘게 달려가야 했다. 그때 열살 때부터 밥을 짓는 것을 배웠으니 훗날 혼자서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처음 시작한 것이 나무장수였고 다음이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그리고점원노릇.

   결핵을 앓은 것은 열아홉살 때부터였다. 처음엔 숨이 차고 몹시 피곤했지만 그런대로 두해를 더 버티다가 결국 1957년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마을에는 객지에 갔다가 결핵으로 돌아온 아이들이 나 말고도 10여명이나 되었다. 식모살이 갔던 성애와 철도기관사 조수로 일하던 태호, 산판에서 일하던 청수, 기덕이, 옥이, 성란이. 우리는 이따금 나오는 항생제를 배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허탕치고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약이 필요한 만큼 공급되지 않아서였다.

   하나 둘씩 차례로 죽어갔다. 열일곱살의 기덕이는 빨간 피를 토하다 죽고, 열다섯 살의 옥이는 주일학교 동무들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다 죽고 마지막 나 혼자만 남았다. 나는 늑막염과 폐결핵에서 신장결핵 방광결핵으로 온몸이 망가져갔다. 병을 앓는 나도 고통스럽지만 식구들의 고통은 더 심했을 게다. 어머니는 내가 아니었으면 좀더 오래 사셨을 텐데 자식 병구완하시느라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첫아들을 장티푸스를 앓으면서 사산(死産)하시고 셋째는 열일곱살 때 잃고, 둘째와 넷째는 해방 이듬해 헤어진 뒤 결국 다시 만나보지 못하셨다. 그런 어머니는 1964년 가을에 세상을 뜨셨다. 몸져누우시기 전날까지 병든 자식 걱정하며, 헤어진 자식 기다리며 사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나는 세상이 싫어졌다. 그래서 이 무렵 나는 동생을 결혼시켜야 하니 어디 좀 나갔다 오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 무작정 집을 나왔다.

   1965년(28세) 4월에 나갔다가 8월에 돌아왔다. 그때 대구에서는 이윤복군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영화화되어 거리마다 극장 포스터가 나붙어 있었다. 나는 대구에서 김천으로, 상주로, 점촌, 문경, 예천으로 3개월을 떠돌아다녔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 생활인 걸식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병 한 가지를 더 얻었다. 그때부터 앓기 시작한 부고환결핵으로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열이 올랐다. 산길에 쓰러져 누워있다 보면 누군가가 지나다 보고 간첩으로 오해를 하기도 했다. 그 사이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이곳 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은 1967년(30세)이었다. 전에 살던 집은 소작하던 농막이어서 비워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한평생 당신들의 집이 없었다. 가엾은 분들이다.

   서향으로 지어진 예배당 부속건물의 토담집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다. 외풍이 심해 겨울엔 귀에 동상이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낫곤 했다. 그래도 그 조그만 방은 글을 쓸 수 있고 아이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창호지문에 빗발이 쳐서 구멍이 뚫리고 개구리들이 그 구멍으로 뛰어들어와 꽥꽥 울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지금 우리집엔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심성이 착해서 좋다. 이름을 '뺑덕이' 라 지었더니 아이들이 왜 하필이면 뺑덕이라 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심청전에 나오는 뺑덕어미가 훨씬 인간적인 가엾은여인이어서 좋기 때문이다.

   예배당 문간방에서 16년 살다가 지금은 이곳 산밑에 그 문간방과 비슷한 흙담집에서 산다. 사는 거야 어디서 살든 그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과 굶주림, 그 속에서도 과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앞서간다는 선진국은 한층 더 심하다. 그들은 침략과 약탈과 파괴와 살인을 한 대가로 얻은 풍요를 누리는 천사처럼 보이는 악마일 따름이다.

   우리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선진과 후진이 없어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분단도 하루속히 무너뜨려야 한다. 경제적 후진만으로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기름진 고깃국을 먹은 뱃속과 보리밥을 먹은 뱃속의 차이로 인간의 위아래가 구분지어지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약탈과 살인으로 살찐 육체보다 성실하게 거둔 곡식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정신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길이 아닐까.

   누가 이렇게 물었다.

   "장가는 못가봤는가요?"

   "예, 못가봤습니다."

   "그럼, 연애도 못해밨나요?"

   "연애는 수없이 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하고도 아이들하고도 강아지하고도 생쥐하고도 개구리하고도 개똥하고도……

≪녹색평론≫제61호 2001년 11~12월호

제발 그만 죽이십시오

  위대한 백인의 승리'란 영화를 주말 명화극장 시간에 본 기억이 납니다. 흑인 권투선수 챔피언을 백인들이 온갖 치사한 방법을 동원해서 아예 세상에서 매장시켜버리는 '치사한 백인의 승리'를 그린 영화였습니다.

  지금 그런 치사한 백인의 승리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란 마흔살짜리 사나이를 잡기 위해 정의의 기치를 앞세워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마구잡이로 폭격하고 있습니다.

  얄궂게도 이런 때 유엔과 코피아난 사무총장님의 노벨평화상 수상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순진해서 그런지 노벨평화상 받는 사람은 절대 전쟁을 안할 거라 생각했는데,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신 우리 대통령각하가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노벨평화상금이 어마어마하게 큰돈이라는데 주최측에서 그 상금을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을까요?

  하기야 노벨상금이란 것 자체가 무시무시한 폭발물을 만들어 장사해서 번 돈이니 그다지 도덕적이지도 않고 평화적이지도 않습니다.

  8․15 해방 직후에 모든 사람이 자유를 찾느라 복잡한 시대를 지냈습니다. 어느 참봉댁 머슴이 보따리를 싸들고 그 집을 나섰습니다. 이유는 참봉 어르신네가 다 큰 머슴을 보고 "이놈! 저놈!" 하는 것이 심사가 비틀린 거지요. 보따리를 둘러메고 머슴이 대문을 나서자 다급해진 참봉님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머슴의 뒷덜미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이놈아! 다시는 이놈 소리 안할 테니 가지 마라, 이놈아!"

  습관이란 건 몸에 배어버리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더욱이 권력을 누리고 있던 인간이야 제 버릇 어떻게 버리겠습니까.

  영국과 미국은 자기네들이 세계의 영원한 제국인 줄 알고 있나 봅니다. 화가 루오의 그림 속에 나오는 어느 임금님처럼, 돈 많은 아줌마처럼 하느님께 특별허가증이라도 받아놓은 것같이 자신만만한 모양입니다. 미국 국민의 90퍼센트의 지지를 받고,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극단 테러리스트만 빼놓고 전세계가 이 전쟁에 동참하고 있는 것처럼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테러집단 응징에 동참하지 않으면 모두 적으로 본다니까 약소국가들은 어쩔 수 없이 초등학교 1학년생처럼 "예! 예!" 손을 드는 거지요.

  그런데 일본이란 나라는 한술 더 뜨고 나서는 게 가관입니다. 세계서 둘째가는 경제대국이 훈도시까지 다 벗은 꼴이어서 민망스럽습니다. 권력이라는 것이, 돈이라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 생각하니 삼국지 백번 읽는 것보다 세상이 명백해집니다.

  아이들의 영원한 친구 피터팬과 앨리스의 동화가 있는 나라, 셰익스피어와 스쿠루지의 찰스 디킨즈가 있고 정직했던 대법관 토마스 모어가 있는 나라, 이런 영국이 삽시간에 악마가 되어버렸습니다.

  대영박물관 역사유물들이 모두 전쟁으로 약탈해다 놓은 것처럼 영국은 문화예술도, 동심도, 정의도, 그렇게 약탈해다 전시만 해놓는 나라인가요?

  선진국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들에게 언제 평화가 있었습니까. 혹시 그들만의 평화는 있었을지 모르지요. 수많은 약소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노동과 자원을 착취하고 정신까지 뺏아간 그들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평화를 선전하면서 한번도 반성도 참회도 안했습니다.

  인디언들과 그곳 수많은 동물을 학살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먼 곳 아프리카인들까지 끌고 가 노예를 삼아 거대한 부자가 된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느님마저도 독점을 했고 다른 나라 종교는 모두 이단이라 미신이라 왜곡시켰습니다. 그렇게 학살과 파괴와 능멸 위에 세워진 거대한 모든 것을 선진이라 했고, 평화라 했고, 정의라 했고, 도덕이라 했고, 예술이라 했습니다.

  작년인가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어딘가 조사를 했다는데 뜻밖에도 가장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시였다지요. 반대로 가장 자살자가 많은 나라는 최대 복지국가인 선진국이었다니 어째서 그들은 죽고 싶을 만큼 불행했을까요.

  흔히 폭력적인 인간은 미개하고 가난한 나라 국민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온몸으로 밭을 갈고 김을 매고 등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은 폭력을 일삼을 기운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바보 이반은 임금이 되고도 노동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몸으로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무시무시한 핵무기를 만들며 세균으로 무기를 만들겠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언젠가는 모두 죽습니다. 그냥 제 명대로 살다 죽는 것도 죽을 때는 서러운데, 왜 비참하게 전쟁으로 산 목숨을 죽이는지 그것만은 절대 지지해서는 안됩니다.

  노벨평화상을 1년에 한명씩 뽑아 준다고 세상이 평화로 지켜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노벨상 재단이 가지고 있는 많은 돈을 차라리 한맺힌 사람들, 강대국에 의해 학살당하고 빼앗기고 쫓겨난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냥 나눠주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전쟁으로 약탈해다 부자가 된 나라는 모든 걸 되돌려줘야 할 것입니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지는 못하지만 뺏아간 건 돌려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단에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원한을 산 이웃과 화해하라고 성경책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화충돌이란 말도 안됩니다.

  미국은 뼈속까지 아프게 반성해야 합니다. 인디언들에게 저지른 만행에서 아프리카에서 행한 노예사냥, 그리고 아시아에서 일으켰던 모든 전쟁과 최근 코소보 전쟁까지, 미국은 수백년간 전쟁으로 시작된 전쟁의 역사였지 평화와 정의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헐리우드 영화의 폭력은 그런 역사가 만들어낸 미국만의 폭력문화입니다. 서부활극에서 마피아 영화까지 미국은 온 세계에 이런 폭력을 퍼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무역센터 비행기 폭파사건도 미국이 저지른 폭력이 부메랑처럼 되돌아간 것이지 다른 누가 일방적으로 저지른 건 절대 아닙니다. 지금 탄저균 살포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미국인들을 보고 있자니 한심스럽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만주에 있던 일본군 731부대에서 인간생체실험용으로 만들었던 화학무기가 패전 후 고스란히 미국으로 옮겨진 것으로 압니다. 그중 일부는 한국전쟁시 휴전선 근처에 뿌려졌고, 80년대 이란 이라크 전쟁시엔 화학무기로 사용되었지 않습니까. 미국이 이라크에 제공했던 세균무기로 걸프전 때 미군 다수가 피해를 입었고, 이번엔 결국 미국 본토까지 탄저균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과학문명은 인류에게 좀더 나은 삶을 위해 많은 과학자들이 일궈낸 성과물임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 인류의 바람과는 다른 악마의 모습으로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히로시마, 나가사끼의 원폭피해는 과학의 이중성을 똑똑히 보여주었습니다.

  뉴욕 맨하탄의 비행기 테러는 슬픈 일입니다. 1백십층짜리 건물만 무너진 게 아니라 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고 있던 가족들이, 아들 딸이 죽고, 아버지가 죽고, 형제가 죽고, 친구가 죽었는데 왜 가슴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미국은 알아야 합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란 테러리스트를 만든 건 미국이 저지른 여태까지의 잔인하고 더 큰 테러입니다. 빈 라덴을 잡기 전에 미국이 쌓아놓고 있는 어마어마한 전쟁무기를 폐기처분할 생각은 없을까요. 그러지 않고는 빈 라덴이 잡혀 죽은 뒤에도 똑같은 오사마 빈 라덴은 계속 생겨날 것입니다.

  무기를 만드는 그 엄청난 비용을 평화를 위해 사용하면 누가 미국을 미워하겠습니까. 만약 그리 하고도 못된 테러리스트가 있다면 그때는 정말 온 세계가 나서서 응징할 것입니다. 지금 세계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미국의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연을 봅시다. 자연은 말이 필요없습니다. 땅 위로 하늘과 물 속에서 뭇 생명은 자연스레 자신의 삶의 터전 그 자리에서 너무도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자신만을 위해 자신의 동족만의 제국을 만들지 않습니다. 커다란 코끼리에서 조그만 개미까지 서로 조금씩 희생하면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백인들이 미개인이라 불렀던 인디언들은 대지는 모든 목숨들의 것이라 생각하여, 사지도 팔지도 소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이슬람이나 기독교의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자연대로 태어나 자연대로 살다가 자연대로 죽는 것이 진정한 종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욕심내어서는 안됩니다. 조금씩은 배고프고 춥고 불편하게 사는 게 평화로운 삶이 됩니다.

  뉴욕 맨하탄 테러로 희생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이번에 겪은 참상이 가슴아픈 일인지 알았다면, 지난날 미국인과 영국인이 저질러온 수백년간의 폭력으로 지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참혹하게 죽어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얼마나 또 슬프게 고통스럽게 살아왔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또다른 테러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있는 것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 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미국은 스스로 자멸하고 말 것입니다.

  제발 좀 그만 죽이십시오.

2001년 10월 25일     

1866년 미국의 셔먼호 침략 이래     

백년이 넘도록 시달리고 있는 한국에서

출처 : 중랑동화읽는어른
글쓴이 : 김형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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