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주의 남자 > ⓒKBS 제공 |
'계유정난'은 이 사극의 역사적 배경이다. 수양대군이 세종·문종 때의 원로 신하를 모조리 쳐내고 정권을 찬탈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렇기에 < 공주의 남자 > 는 팩션이라도 < 성균관 스캔들 > 식의 청춘 멜로 사극이라는 장르적 허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실 승유와 세령 그리고 정종(이민우)과 경혜공주(홍수현)의 멜로가 따로 빠져 있다면 이 사극은 본격 정통 사극처럼 보인다. 사육신이 등장해 형장의 이슬이 되기까지 수양대군에게 일갈을 가하는 장면은 KBS에서 2007년도에 방영되었던 < 사육신 > 이라는 사극을 떠올리게 한다. 그만큼 비장하고 역사적 사건에 대해 진중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인 비장미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 공주의 남자 > 가 정치 사극이냐, 아니면 멜로 드라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답은 후자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
여기에는 멜로 드라마에 대한 대중의 오해가 담겨져 있다.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하고 헤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멜로 드라마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멜로 드라마는 그것이 드라마라는 장르에 담기는 순간 사회적인 담론을 담기 마련이다. 즉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는 계급적인 구조가 담겨지게 마련이고, 그 둘 사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사회적인 억압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 보스를 지켜라 > 같은 로맨틱 코미디물의 멜로 드라마조차 그 안에 빈부 격차나 사회 계급이 갖는 차별적인 시선이 들어 있지 않은가. 멜로 드라마에서 사랑하는 남녀의 결혼을 반대하는 인물은 그 사회적 편견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멜로 드라마는 심층적으로 들어가면 결코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들어 멜로 드라마가 사회적인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게 된 것은 바로 이런 특성 때문이다.
드라마와 역사가 대결을 벌이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 드라마적인 성격과 지극히 사적으로 여겨지는 멜로 드라마적인 성격이 맞물리는 부분이다. 수양대군은 공적인 입장(역사적인 입장)에서는 말 한마디에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력의 소유자이다. 그런데 그런 수양대군도 딸 세령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 아비로서의 심사를 드러낸다. 즉, 수양대군과 딸이 서로를 마주보며 대결하는 장면은 마치 이 지극히 사적인 관계가 역사와 대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양대군이라는 역사를 그 앞에 세워두고 세령이라는 사적 인물이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얼마나 더 많은 피를 보셔야 그 업이 자식에게도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으시겠습니까?" 세령이 수양대군을 꾸짖는 장면은 마치 작가의 현재적 관점이 픽션을 통해 역사적 인물을 꾸짖는 듯한 정경을 만들어낸다.
< 공주의 남자 > 가 지금껏 나왔던 사극의 흐름 속에서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은 공적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사실과 지극히 사적이고 허구적인 멜로의 대결이 첨예하게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사극은 한때 역사라는 사실이 갖는 힘에 기대 정통 사극으로 성장했다. 그렇다 보니 역사가 다루는 인물 바깥의 이야기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퓨전 사극은 그 역사 바깥으로 밀려난 인물의 이야기를 상상력을 통해 복원해내려 했다. 그리고 상상력은 점점 더 역사를 압도하면서 사극을 허구의 이야기로 만들었고, 그 정점에서 < 추노 > 나 < 성균관 스캔들 > 같은 이른바 장르 사극이 등장했다. 즉 사극의 성장은 지금껏 역사를 휘발시키며 상상력을 무한 질주시킨 지점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 사극이 역사 자체를 버릴 수 있을까. 그것은 스스로 사극이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최근 방영되고 있는 < 계백 > 이나 < 무사 백동수 > 그리고 < 광개토태왕 > 의 난점을 발견할 수 있다. 더 이상 역사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사극은 < 계백 > 이나 < 광개토태왕 > 처럼 자사 방송사가 내놓았던 사극을 반복하거나, < 무사 백동수 > 처럼 아예 무협물화되어버렸다. 새로운 것을 바라는 시청자의 기대를 외면한 듯한 이 사극들은 어딘지 정체된 느낌을 벗어날 수 없다.
< 공주의 남자 > 가 주목되는 것은 역사를 선택하거나, 역사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 한가운데서, 그 역사적 사실과 상상적 허구가 대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병치. 역사와 야사의 병치. 이는 아직까지 지상파에서 보기 힘들었던 본격적인 팩션의 구성이자 묘미가 아닐 수 없다. 자칫 역사 왜곡 드라마라고 볼 수 있는 이 흐름은 사극의 또 다른 도발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사극이 역사가 아니라 하나의 드라마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 역사를 이야기의 재료로 여기는 태도가 꼭 비난받을 일일까. < 공주의 남자 > 의 성공은 어쩌면 앞으로 본격화될 팩션의 새로운 징후가 아닐까.
진화 혹은 퇴화, 그 과정에서 새로 태어나는 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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