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함께하는 교육] 청소년 이성교제
남녀칠세부동석 운운하던 시대도 한참이나 지났건만 학교와 학부모들은 '이성교제'에 대해 여전히 까칠하다. "안 된다"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일까. 학교와 부모 눈치 살펴가며 '몰래 연애'를 하는 학생들의 사연은 늘어만 간다.
"남친요? 70일 정도 됐어요."
지난 9월28일 오후, 서울의 한 청소년문화의집에서 만난 고교 2년 은지(가명)양이 수줍은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둘의 교제는 남친의 고백으로 시작됐다.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던 어느 날, 그 친구들 중 한 명이었던 남친이 학원 앞에 찾아와 사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들의 데이트는 평범하다. 야간자율학습이 없는 날 저녁시간이나 주말 등을 이용해 피시방, 영화관에 간다. 가끔 친구 커플과 함께 데이트를 하기도 한다. 교복을 입은 채로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볼이나 입술에 입맞춤을 해도 거리낌이 없다.
"시대가 변했지. 요즘 아이들 참 개방적이야." 거리는 이들의 연애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바라보지만 학교는 그렇지 않다. 이들의 학교는 이성교제 자체를 교칙으로 금지한다. 이성교제를 하다 적발되면 적게는 5점, 많게는 10점의 벌점을 준다.
남학생과 여학생 단둘이 장난치는 모습을 보여도 벌점이 매겨진다. 은지양과 남친이 '몰래 연애'를 하는 이유다. 은지양은 "아이들이 과도한 스킨십을 하거나 학업에 나쁜 영향을 줄까 봐 엄한 규칙을 만든 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성교제는 허용을 하되 어느 수준에서 스킨십에 대한 제한을 두면 좋겠다"고 했다. 학교는 공식적으로 이성교제를 금지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반에서 3분의 1 정도는 이성교제를 하고 있고, 이 가운데 같은 반 친구끼리의 교제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기숙사 있는 학교일수록 엄격한 교칙
2010년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가 전국 주요 지역 중·고교 354곳을 조사한 결과 81%에 해당하는 286개 학교가 학생들의 이성교제나 신체접촉 등을 금지하는 교칙을 두고 있다.
교칙이 엄격한 학교는 기숙학교인 경우가 많다. 남녀 기숙사 공간이 떨어져 있긴 하지만 학생들이 수업시간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을 함께하기 때문에 학교는 이성교제에 대한 고민이 많다.
육군사관학교는 육사 교내에서 남자 상급생도가 여자 하급생도를 성폭행하는 등 일탈 행위가 드러나자 지난 8월 금혼·금주·금연 등 3금 제도를 강화하는 '육사 제도·문화 혁신' 방안을 마련했지만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이성교제를 금지하는 것은 차별"이라는 결정이 나온 바 있다.
기숙학교 학생들 중엔 육사생도라고 불러도 될 만큼 엄격한 규율 아래 생활하는 학생들도 있다. 기숙학교인 ㄱ고교에서는 이성교제는 허용하되 남녀 학생끼리 스킨십을 하거나 밀폐된 공간에 있는 모습을 들키면 벌점을 준다. 몇몇 학생들이 이미 교내 봉사활동 등을 통해 벌점을 받았다. 학교생활기록부에는 '봉사'라고 적히지만 학교식당 게시판에는 '부적절한 이성관계'라는 사유가 적혔다.
학교는 이성교제에 대해 나름의 조처를 취한 셈이지만 최선의 처방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몰래 연애'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학교 1학년 이아무개양은 "규율이 세니까 오히려 연애가 은밀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선생님한테 안 걸려야 하니까 늦은 시간에 어두운 데서 만나는 애들도 있습니다. 자습 끝나는 시간이 11시40분인데요. 끝내고 기숙사 들어가는 이동 시간에 으슥한 곳에서 만나요. 오히려 위험해질 여지가 많죠. 이성교제를 자꾸 음지의 영역에 두지 말고, 어느 정도 개방해서 건강하게 만나도록 해주면 좋겠어요. 지금은 처벌도 너무 무겁습니다."
물론 모든 학교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학교 차원에서 이성교제를 어느 정도 허용하고, 상담교사나 보건교사가 학생들과 두터운 신뢰를 쌓아둔 경우, 학생들은 스스로 '연애중'이라고 밝힌다.
'공개된 연애'로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낸 사례도 나온다. 얼마 전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부산 ㅇ고교 1년 김아무개군은 "여친이 생기고 페이스북 소개란에 '연애중'이라고 표시를 해뒀는데 말은 안 했지만 매우 뿌듯했다. 부모님이랑 담임선생님도 아시니까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고 '개념 커플'처럼 보이고 싶어서 둘 다 노력중이다"라며 웃었다.
학생들 입장에선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이성교제를 막을 게 아니라 학부모나 학교가 이성교제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 접근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서울 ㄱ고교 1년 김아무개군은 "청소년기에 이성에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한 건데 이성교제는 무조건 막으면서 아이들 주변의 현실이 어떤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이성교제는 공부 못하는 애들만 하고, 잘하는 애들은 안 한다는 편견도 깨야 한다. 기숙형 외국어고의 경우, "외고는 '애고(愛高)'"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연애를 하는 친구도 많다.
전국 350여 중·고교 조사했더니
열에 여덟은 교칙으로 규제
그럴수록 학생들은 은밀해진다
규칙 만든 취지는 이해가 가지만
건강한 만남 갖도록 이끌어주면
좋겠다는 게 학생들의 바람이다
잘 사귀면 서로 자극제도 된다는데
SNS 통해 이성친구 만나는 사례 늘어
최근엔 어른들처럼 온라인 게임이나 트위터, 페이스북을 비롯한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이성친구를 만나는 청소년도 늘고 있다. 이런 창구들은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 갇힌 청소년들에게 좀더 편하게 이성친구를 만나게 해주는 통로가 된다. 기숙학교 학생들의 경우는 외출이 허용되는 날, 통학형 학교의 경우는 주말 등을 이용해 얼굴을 모르고 사귀게 된 상대를 직접 만나기도 한다.
서울 ㄱ고교 이아무개 보건교사는 이런 경우를 '좋지 않은 연애'라고 말한다. 오프라인에서는 인상착의만 봐도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를 알 수 있지만 온라인에서 시작한 만남은 상대를 얼마든지 속이는 만남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요즘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상을 사귀는 일도 많아요. 이것도 추천하고 싶지 않은 이성교제죠. 연상과 사귀면 평등한 관계 형성이 어렵잖아요. 상대방 위주로 놀기 쉽죠. 그 사람이 노는 대로, 먹는 대로 패턴을 따라가게 되니까요. 원치 않는 경험을 하게 되는 일도 생길 수 있고요."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가 이성교제를 한다고 하면 '남자는 늑대다'라는 식으로 남학생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만들어버린다. 서울 ㄱ고교 2년 최아무개군은 "얼마 전 가끔 만나는 여자애가 버스정류장에서 갑자기 나를 확 안더라. 마침 담임선생님한테 들켜서 한 소리 들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자애들 잘못으로만 몰고 간다"고 불만을 이야기했다. "이성교제를 하면 으레 남자애들이 성적인 접촉을 원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책임지지도 못할 건데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애들도 많아요. 남녀 성향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여자애들 중에 부담스럽게 스킨십을 강요하는 애들도 있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상대 배려심 높아지는 긍정적 효과도
때론 잘 사귄 이성친구가 힘든 학창시절을 잘 보낼 수 있게 해주는 든든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 보건교사는 "이성친구가 있다는 건 아이들에게 공부 외에 '플러스 알파'로 어떤 능력이 더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나는 공부도 잘하는데 이런 것도 한다'는 식으로 자존감을 높여주는 요소도 됩니다. 잘 사귀면 자극제가 되어서 자기 목표도 세우게 하죠. '우리 좋은 대학에 가서 같이 성공하자'는 식의 목표를 함께 세우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 친구들의 연애가 대학 이후까지 이어지긴 어렵지만요.(웃음)"
실제로 기숙학교 ㄱ고 1학년 이아무개양은 중1 때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 사귀는 남자친구가 있다. 이양은 기숙학교, 남자친구는 기숙학교가 아닌 학교에 다닌다. 이양이 한 달에 한두 번 외출을 할 때 얼굴을 보는 사이다. 둘 역시 남들처럼 영화관, 서점 등에서 데이트를 즐긴다. 다른 점이라면 둘의 관계를 부모님도 알고 있다는 거다. 이양은 "부모님은 저한테 관대한 편"이라고 했다. "네가 좋으니까 사귀는 거고, 둘이서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사람 사이에서 관계 맺는 법을 배우는 경험이 될 거라는 이야기도 하셨구요. 손잡는 거 이상은 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웃음)"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강석영 선임연구원은 "최근 들어서는 이성교제에 대한 학부모님들의 관심이 늘고 있다. 예전처럼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해서 통제가 안 된다는 걸 아시는 거다"라고 했다.
"이젠 부모님들이 하지 말라고 해서 통제가 되는 게 아니란 걸 아시는 거죠. 어떻게 하면 건전한 이성교제를 가르쳐줄지, 성교육은 어떻게 할지 공부하는 분들도 많아집니다. 이성교제의 긍정적 기능도 있어요. 해본 아이들과 안 해본 아이들은 표현 방식이나 사람을 대하는 접근 방식들이 많이 다르죠. 이성을 사귀면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참고,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잖아요. 아이들한테는 대인관계 맺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죠."
부모들도 자녀의 이성교제에 현실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판에 엄격한 규칙만 세워두고 별다른 성교육도 하지 않는 학교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이 보건교사의 경우, 보건수업 때 아이들 수만큼 콘돔을 갖고 가서 수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수업은커녕 수업 운영 자체가 제대로 안 되는 학교도 많다.
서울 ㅅ고교 2년 이아무개군은 "성교육과 관련해서 대안학교인 경남 마산 태봉고 사례를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그 학교 시스템을 보고 나도 아이를 낳으면 저런 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교육방송 <학교란 무엇인가> 중 '학교의 고백' 편에 나왔던 사례였어요. 우리나라 학교에서 콘돔 같은 게 나오면 어떻게든 덮어버리고 관련된 학생을 처벌하는 식이잖아요. 근데 이 학교에서는 콘돔이 발견되자 다른 대처를 하더군요. 구성원 모두가 모여 회의를 열고 이성교제 등에 대한 생활규칙을 상의했어요. 무조건 안 된다고 하기보다는 아이들 스스로 자기 선을 지킬 수 있게 공론화하는 자리가 마련됐으면 좋겠습니다."
김청연 기자carax3@hanedui.com
http://media.daum.net/society/education/newsview?newsid=20131008115009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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