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상속자들 > ( < 상속자들 > )의 명대사는 "나 너 좋아하니?"여야 했다. 하지만 임팩트가 약했다. '애기야, 가자'나 '이 안에 너 있다' 같은 < 파리의 연인 > 의 명대사와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고, < 신사의 품격 > 의 장동건 어투인 '~인 걸로'보다도 못했다. 그런데 엉뚱한 말이 떴다. "나니까 가능해." < 상속자들 > 작가인 김은숙의 기사 헤드라인이었다.
JTBC < 썰전 > 에서 슈퍼주니어 김희철은 김은숙 작가에게 '로맨스 코미디, 로코의 자가복제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물었다는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그러자 김 작가 왈 "맞는 말이지. 하지만 아무나 못해. 나니까 거품 키스 만들어내고, 나니까 '애기야, 가자' 이런 거 만들어내지." 참으로 건방지게 들린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들을 보면 틀리다고 반박할 수가 없다.
김은숙의 '로코' 신화는 2004년 < 파리의 연인 > 에서 시작했다. < 프라하의 연인 > < 연인 > 으로 이어지며 < 온에어 > 로 정점을 찍었고. 김선아·차승원 주연의 < 시티홀 > 은 좀 삐끗했지만 잠시뿐이었다. < 시크릿 가든 > 으로 판타지 로코까지 영역을 넓혔고, 40대에도 여전히 철없는 남자들의 < 신사의 품격 > 은 장동건의 성공적인 복귀작이 되었으며, 이종혁을 스타로, 김수로·김민종을 다시 오빠로 돌려놓았다.
ⓒSBS < 상속자들 > 화면 캡처 < 상속자들 > (위)은 고등학생인 재벌가 2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
김수현의 시대에서 김은숙의 시대로
더 이상 새로운 러브스토리는 없다. 세상 모든 사랑 이야기의 원형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썼고, 시한부 인생이 등장하는 작품은 에릭 시걸이, 재산과 권력이 얽힌 블록버스터 연애는 시드니 셸던이 썼다. 그 외에도 굵직한 작품들은 이미 누군가 썼고, 크게 히트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어디선가 본 듯한 작품을 찾는 건, 지구상 어딘가에 있다는 나를 꼭 닮은 도플갱어를 찾는 일보다는 훨씬 쉬울 게 당연하다.
하지만 비슷한 구성으로 연이은 대박을 빵빵 터뜨리는 건 확실한 능력이다. 물론 달달한 대사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 작가 김은숙은 시대의 결핍을 읽어 이를 작품에 반영하며, 현실의 부족을 상상 속의 행복으로 치환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기에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SBS < 상속자들 > 화면 캡처 최영도를 연기한 김우빈(위)이 없었다면 < 상속자들 > 의 인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
그렇지만 시대가 바뀌며 사회는 달라졌다. 지식보다 육체가, 이상보다는 현실이, 사회적 성공보다는 경제적 보상에 주목했다. 김수현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실존인물이 되었고, 더 이상은 사랑스럽지 않은, 따지기 좋아하고 피곤한 인물로 바뀌었다.
1990년대 드라마는 부정한 방법으로 돈벌이를 하고 재산싸움을 벌이는 주인공과 이복형제, 가족들을 부끄러워하며 오열하는 장면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 꽃보다 남자 > 는 당당히 외쳤다. "우리 집 돈 많아. 그게 뭐 어떻다고!" 세상은 결과만을 중시했고,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 부자면 행복해질 거라는 허상을 심기에 충분했다.
마치 마술 같은 캐릭터들의 향연
그 후 등장한 수많은 드라마가 돈과 재산, 명예를 두고 싸우며 배신과 복수까지 다채롭게 펼쳤지만, 그 과정에서 잃은 것도 있으니 그건 바로 '로맨스'였다. 현실이 너무 무겁다 보니 사랑을 얻고자 모든 걸 내려놓으려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는, 너무나도 비이성적으로 여겨질 즈음 등장한 '김탄'은 그야말로 2013년 < 상속자들 > 로 김은숙의 시대가 만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국그룹보다 사랑이 더 중요한 고딩을, 사랑의 힘으로 서자라는 걸 공개하는 용기를, 누가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세상 대부분의 문제가 돈이 있으면 해결된다는 건 어린아이들도 안다. 그런데 < 상속자들 > 은 재계 순위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는 상속자들 틈에서, 결혼은 기업 M & A 일환이라는 드라마 속 살풍경을 보여주었다. '졸부'가 되더라도 행복은 결국 돈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걸 반전처럼 보여주며 왠지 모를 흐뭇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래, 저들도 우리처럼 사는 건 모두 힘들어'와 비슷하다고 할까.
하지만 스토리의 힘만으로는 인기를 설명할 수 없다. < 상속자들 > 의 중심에는 최영도를 연기한 '김우빈'이 있다. 사회적 배려 대상자(사배자)를 이지메하는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슬픔이 가득한, 캐릭터와 100% 일체감을 보여주는 김우빈이 없었다면, 지금의 인기는 불가능했다.
"너 아닌 다른 사람들을 괴롭힐 거야. 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어." 자학도 서슴지 않는 오로지 직진뿐인 돌직구 사랑은 긴 팔다리를 휘저으며 한 번, 카리스마 눈빛으로 두 번, 명대사로 마지막 정점을 찍는다. '카톡 세대'답게 짧고 강렬한 문장으로 힘주어 말하는 최영도는 김수현의 "부숴버릴 거야"에 맞먹는 신세대 남성상이다. 초식남만 가득한 현실이기에 돋보일 수밖에 없는.
잘 짜인 플롯 속에 주인공이 명대사를 던져도 부족한 부분은 있기 마련. 김은숙은 '그래서 어제 어땠어?'만 외치는 주인공 친구 따위는 없는 수많은 조연 캐릭터를 살려냈다. '진짜 사나이' 박형식과 에프엑스(fx) 크리스탈은 조명수·이보나로 살아 숨쉬고, 라헬(김지원)과 효신(강하늘)이 한 프레임에 잡히면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진다.
작은 사모님과 도우미 아줌마의 케미(화학반응을 뜻하는 영어 케미스트리의 준말. 강한 끌림이나 궁합 등을 일컬음)가 등장하는 모습은 큰 접시 몇 개씩 숨가쁘게 돌리면서, 다른 작은 접시들도 쓰러뜨리지 않는 마술사나 가능한 모습이라 해도 될 만큼 장관이다. 이런 작가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마무리하며 한마디 "그래, 김은숙 작가, 너니까 가능했다." 다음 작품도 기대하마.
곽동수 (숭실사이버대학교 외래교수) / webmaster@sisain.co.kr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3122116001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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