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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보는 오후>/우리나라 드라마소식

그래, 김은숙 너니까 가능했다

SBS <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상속자들 > ( < 상속자들 > )의 명대사는 "나 너 좋아하니?"여야 했다. 하지만 임팩트가 약했다. '애기야, 가자'나 '이 안에 너 있다' 같은 < 파리의 연인 > 의 명대사와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고, < 신사의 품격 > 의 장동건 어투인 '~인 걸로'보다도 못했다. 그런데 엉뚱한 말이 떴다. "나니까 가능해." < 상속자들 > 작가인 김은숙의 기사 헤드라인이었다.

JTBC < 썰전 > 에서 슈퍼주니어 김희철은 김은숙 작가에게 '로맨스 코미디, 로코의 자가복제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물었다는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그러자 김 작가 왈 "맞는 말이지. 하지만 아무나 못해. 나니까 거품 키스 만들어내고, 나니까 '애기야, 가자' 이런 거 만들어내지." 참으로 건방지게 들린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들을 보면 틀리다고 반박할 수가 없다.

김은숙의 '로코' 신화는 2004년 < 파리의 연인 > 에서 시작했다. < 프라하의 연인 > < 연인 > 으로 이어지며 < 온에어 > 로 정점을 찍었고. 김선아·차승원 주연의 < 시티홀 > 은 좀 삐끗했지만 잠시뿐이었다. < 시크릿 가든 > 으로 판타지 로코까지 영역을 넓혔고, 40대에도 여전히 철없는 남자들의 < 신사의 품격 > 은 장동건의 성공적인 복귀작이 되었으며, 이종혁을 스타로, 김수로·김민종을 다시 오빠로 돌려놓았다.

ⓒSBS < 상속자들 > 화면 캡처 < 상속자들 > (위)은 고등학생인 재벌가 2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그다음 작품이 < 상속자들 > . 아무리 재벌가 2세들이라고 해도, 젖비린내 가시지 않은 고등학생들의 사랑 이야기를 누가 볼까 했지만, '역시 김은숙!'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결과는 멋졌다. 미드 < 가십걸 > 과 드라마 < 꽃보다 남자 > 를 버무려 김은숙답게 자가복제를 했다고 씹는 이들도 있었지만, 신데렐라와 캔디의 무한반복이라도 상관없다. 차은상(박신혜)을 두고 사랑을 감추지 못하는 김탄(이민호)과 최영도(김우빈)는 2013년 누나들의 마음을 흔든 살아 숨쉬는 캐릭터가 되었으니 말이다.

김수현의 시대에서 김은숙의 시대로


더 이상 새로운 러브스토리는 없다. 세상 모든 사랑 이야기의 원형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썼고, 시한부 인생이 등장하는 작품은 에릭 시걸이, 재산과 권력이 얽힌 블록버스터 연애는 시드니 셸던이 썼다. 그 외에도 굵직한 작품들은 이미 누군가 썼고, 크게 히트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어디선가 본 듯한 작품을 찾는 건, 지구상 어딘가에 있다는 나를 꼭 닮은 도플갱어를 찾는 일보다는 훨씬 쉬울 게 당연하다.

하지만 비슷한 구성으로 연이은 대박을 빵빵 터뜨리는 건 확실한 능력이다. 물론 달달한 대사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 작가 김은숙은 시대의 결핍을 읽어 이를 작품에 반영하며, 현실의 부족을 상상 속의 행복으로 치환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기에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SBS < 상속자들 > 화면 캡처 최영도를 연기한 김우빈(위)이 없었다면 < 상속자들 > 의 인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체도 벌떡 일어나게 한다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상징은 '대가족'이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헌신적인 어머니를 중심으로 할머니와 자녀들도 등장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핵심은 '센 여자 캐릭터'였다. 윤여정·배종옥·심은하로 이어지는 이들은 고리타분한 가치관과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계속되는 부당함에 맞서며 목소리를 높여왔다. 웬만한 남자들은 입도 뻥긋 못할 만큼 논리적이며 실력을 갖춘 여성의 등장은 1970~1980년대로서는 '판타지'였다.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그렇지만 낯설기에 더욱 매력적인 파워우먼, 알파걸의 시대는 김수현 드라마에서 멋진 꽃으로 피어났다.

그렇지만 시대가 바뀌며 사회는 달라졌다. 지식보다 육체가, 이상보다는 현실이, 사회적 성공보다는 경제적 보상에 주목했다. 김수현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실존인물이 되었고, 더 이상은 사랑스럽지 않은, 따지기 좋아하고 피곤한 인물로 바뀌었다.

1990년대 드라마는 부정한 방법으로 돈벌이를 하고 재산싸움을 벌이는 주인공과 이복형제, 가족들을 부끄러워하며 오열하는 장면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 꽃보다 남자 > 는 당당히 외쳤다. "우리 집 돈 많아. 그게 뭐 어떻다고!" 세상은 결과만을 중시했고,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 부자면 행복해질 거라는 허상을 심기에 충분했다.

마치 마술 같은 캐릭터들의 향연

그 후 등장한 수많은 드라마가 돈과 재산, 명예를 두고 싸우며 배신과 복수까지 다채롭게 펼쳤지만, 그 과정에서 잃은 것도 있으니 그건 바로 '로맨스'였다. 현실이 너무 무겁다 보니 사랑을 얻고자 모든 걸 내려놓으려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는, 너무나도 비이성적으로 여겨질 즈음 등장한 '김탄'은 그야말로 2013년 < 상속자들 > 로 김은숙의 시대가 만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국그룹보다 사랑이 더 중요한 고딩을, 사랑의 힘으로 서자라는 걸 공개하는 용기를, 누가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세상 대부분의 문제가 돈이 있으면 해결된다는 건 어린아이들도 안다. 그런데 < 상속자들 > 은 재계 순위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는 상속자들 틈에서, 결혼은 기업 M & A 일환이라는 드라마 속 살풍경을 보여주었다. '졸부'가 되더라도 행복은 결국 돈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걸 반전처럼 보여주며 왠지 모를 흐뭇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래, 저들도 우리처럼 사는 건 모두 힘들어'와 비슷하다고 할까.

하지만 스토리의 힘만으로는 인기를 설명할 수 없다. < 상속자들 > 의 중심에는 최영도를 연기한 '김우빈'이 있다. 사회적 배려 대상자(사배자)를 이지메하는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슬픔이 가득한, 캐릭터와 100% 일체감을 보여주는 김우빈이 없었다면, 지금의 인기는 불가능했다.

"너 아닌 다른 사람들을 괴롭힐 거야. 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어." 자학도 서슴지 않는 오로지 직진뿐인 돌직구 사랑은 긴 팔다리를 휘저으며 한 번, 카리스마 눈빛으로 두 번, 명대사로 마지막 정점을 찍는다. '카톡 세대'답게 짧고 강렬한 문장으로 힘주어 말하는 최영도는 김수현의 "부숴버릴 거야"에 맞먹는 신세대 남성상이다. 초식남만 가득한 현실이기에 돋보일 수밖에 없는.

잘 짜인 플롯 속에 주인공이 명대사를 던져도 부족한 부분은 있기 마련. 김은숙은 '그래서 어제 어땠어?'만 외치는 주인공 친구 따위는 없는 수많은 조연 캐릭터를 살려냈다. '진짜 사나이' 박형식과 에프엑스(fx) 크리스탈은 조명수·이보나로 살아 숨쉬고, 라헬(김지원)과 효신(강하늘)이 한 프레임에 잡히면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진다.

작은 사모님과 도우미 아줌마의 케미(화학반응을 뜻하는 영어 케미스트리의 준말. 강한 끌림이나 궁합 등을 일컬음)가 등장하는 모습은 큰 접시 몇 개씩 숨가쁘게 돌리면서, 다른 작은 접시들도 쓰러뜨리지 않는 마술사나 가능한 모습이라 해도 될 만큼 장관이다. 이런 작가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마무리하며 한마디 "그래, 김은숙 작가, 너니까 가능했다." 다음 작품도 기대하마.

곽동수 (숭실사이버대학교 외래교수) / webmaster@sisain.co.kr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312211600117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