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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시간

[스크랩] 독서이력철을 덮으라 - 국립국어원 웹진 쉼표, 마침표 9월호 중

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어느 개그맨의 말투를 따라해 본다. ‘한국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는 제일 큰 목적은 무엇인가? “즐거움?” “아니죠~.” “논술?” “맞습니다~!” “자기발견?” “아니죠~.” “대입 준비” “맞습니다~!” 우리에게 독서는 대입으로 통하는 길이다. ‘독서는 즐거움이며, 타자에 대한 상상력으로 삶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라고 말하면 현실을 망각한 이상주의자의 선언쯤으로 들린다.
   만 두 살이 갓 넘은 아들은 석 달 전만 해도 ‘수학 천재’였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는 물론이고 근(루트)의 값도 계산할 줄 알았다. “1 더하기 1은?” 하면 “2”라고 하고, “5000 빼기 4998은?” 해도 “2”라고 한다. “2 곱하기 1”도 “2”, “10000 나누기 5000”도 “2”, “루트 4의 값은?” 해도 큰 소리로 “2!”라고 외친다. 답을 하나로 정해놓고 문제를 달리하는 놀이는 숫자 하나를 알게 된 철부지를 ‘수학 천재’로 만들었다(‘5’를 알게 된 아이는 곧바로 천재성을 잃어버렸다).
   답을 하나로 고정시켜 놓고 다른 답을 하면 실망하는 바보 같은 놀이가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으니, ‘독서이력철’이 그것이다. 2007학년도 고등학교 1학년 과정에서부터 시행되고 있는 ‘고등학교에서의 독서 교육 활성화’ 정책,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2010학년도부터 도입되는 ‘고등학생 독서이력철의 대입 전형 자료화’ 정책은 우리 사회가 사람을 계량화하는 데 주저함이 전혀 없다는 걸 잘 보여준다. 이제 학생기록부에는 자신이 읽은 도서 목록이 빠짐없이 저장된다. 그리고 독서와 무관하게 ‘성적 상위 몇 퍼센트’의 학생들에게만 이 독서이력철만으로도 대학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독서, 논술 프로그램과 관련 출판업이 성업을 이룰 수밖에 없다. 서점의 학생 코너에 가보면 어렵지 않게 제목이나 부제에 ‘논술’이라는 단어가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의 어린이 잡지는 ‘꿈과 상상력을 길러주는 어깨동무’ 정도면 충분했지만, 지금은 초등학생 잡지에도 ‘통합 논술 완벽 대비’라는 이름이 박혀 있어야 판매를 기대할 수 있다.
   모 지역 교육청에서는 몇 해 전부터 ‘e-독서 친구’라는 자율 독서 인증제를 실시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꽤 인기를 끌고 있나 본데, 2006년에만 해도 14만 3천여 명이라는 적지 않은 어린이들이 이 프로그램을 이용했다고 한다. 해당 교육청 담당자는 “대도시 학생들에 비해 논술이나 독서 정보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은 시·군 지역 학생이 인터넷을 활용해 다양한 독서 컨텐츠를 이용하면서 독서 능력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고 자평한다. 정보와 경제력에 밀려, 서울의 그럴듯한 대학은 수도권 아이들이 모두 점령해 버린 상황에서 ‘가뭄 속에 허덕이는’ 시골 학생들에게 이 프로그램은 한 줄기 단비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사이트를 잘 활용하면 학원에 다니지 않고도 독서·논술 실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는 담당자의 말 속에 우리가 책을 읽는 행위를 얼마나 왜곡시키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독서 인증을 받기 위한 과정을 들여다보면 서글퍼진다. 한 어린이가 <황소와 도깨비>라는 그림책을 읽은 다음에, 이 사이트에 들어가 다음 문제에 답해야 한다.

   이런 문제 여섯 개 중에서 네 문제를 맞히면 독후감 쓰기 자격이 주어진다. 이 과정을 거치면 학년별 인증을 받는다. 별(☆) 하나를 받으면 다음 단계로 진급한다. 진급을 하면 인증서를 출력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행위는 ‘자율’이다. 원하면 하고 원하지 않으면 안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저런 문제를 준비한다는 것은 책을 기억의 대상, 평가의 징검다리로밖에 생각 못하게 만드는 바보짓이다. 학생들이 원하는 것보다는 선생이 원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구조는 재생산되다 못해 굳건히 강화되고 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일기장 검사와 함께 우리 교육의 우울한 현실인 것이다.
   교과서라는 담을 넘어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닦달하던 옛날에 비해, 다양한 책읽기를 정책적으로 권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지만 독서를 정량화하고 우열을 가리는 수단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문제를 좀 더 우아하게 바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내신 반영률을 몇 퍼센트로 할 것인가로 학벌 사회가 혁파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의 철학은 무엇인가?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기를 바라는가? 다양한 모순들이 공존하는 사회를 꿈꾸는가? 각자의 언어가 다르며, 그런 이유 때문에 대화할 필요와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가? 이런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응답하지 않는 한, 독서이력철 같은 정책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독서는 개인의 영역이다. 자유의 영토이다. 독서는 ‘읽는 행위’ 자체로 완결되는 것이며, ‘즐거움 때문에’라거나 ‘재미있어서’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보장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만의 행위이다. 다른 것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독서를 바라보거나, 독서량을 능력의 기준으로 삼는 사회는 흔들려야 한다. 책읽기는 인권이자, 책읽기를 보장해 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독서를 타자가 들여다보고 평가하겠다는 발상은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 되는 숭고한 영역인 개인의 내밀한 경험 영역을 망각한 결과이다. 이전에는 개인의 취향에 맡겨졌던 책읽기가 우리 사회의 온갖 모순의 원천인 ‘대입’과 연동되어 계량화된다면, 그리하여 상상력마저 사물화해야만 가치 있다고 말하는 사회는 너무 답답하다. 책 읽기는 김동환의 다음 시와 같다. ‘떡갈나무 숲속에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이기에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오지요. 나 혼자 마시고는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 아무도 모르는, 그 깊고 기쁜 비밀을 꼭 알아야 할 것까지는 없다. 그 샘물을 꼭 학생 때 발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책은 책일 뿐이지 진급을 위한 계단이 아니다.
   몇 권을 읽느냐보다 어떻게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 책에서 만나는 세상과 사람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떤 회심(回心)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 천 권의 책을 읽어도 그것이 처세를 위한 기량 연마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한 줄을 읽더라도 그것을 가슴으로 느껴 삶을 건강하게 진보시키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더 책을 잘 읽은 것인가.
   관료주의의 병폐는 획일화이다. 경제 동물들의 본능은 세상 모든 현상을 수치라는 늪으로 밀어넣는 것이다. 그래서 숭고한 노동을 생산성과 화폐로 환산하여 그 가치를 판정하고, 사람들의 삶과 죽음마저도 수로 대치한다. 세상을 죽이는 관료주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음을 효용성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폐기처분한다. 계량화할 수 있는 결과와 지표가 눈앞에 보여야만 존재의 가치를 인정한다. 신의 피조물로서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 되는 개인의 내면마저도 정량화한다. 지금 콩나물과 대나무와 소나무에 똑같이 물을 줬으니 동시에 같은 키로 자라야 한다고 다그친다. 봄의 진달래와 가을의 코스모스가 함께 그럴듯하다고 윽박지른다. 관료주의자들에게 ‘기다림’이란 배부른 소리일 뿐이다. “시험을 쳐서라도 책을 읽혔으면 좋겠다”는 부모, “아침 일찍 학교 가서 뭐해요. 놀기만 하고 딴 짓 하지, 공부도 안 하는데 책이라도 읽으면 좋지”라고 말하는 부모도 획일화의 안락함에 취한 관료주의의 선교사들이다. 관료주의자에게서 우리 아이들을 탈출시켜야 한다. 권장 도서 목록 앞에서 주눅 든 아이들을 데려와야 한다. 교육자가 할 일은 독서이력철을 덮고, 학교 도서관에 책이 넘치게 하는 일이다. 딱 거기까지이다.

출처 : 사)어린이도서연구회 서울지부
글쓴이 : 김지원(지부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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