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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시간

[스크랩] 어버이날에 읽는 권정생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어버이날이다. 

오늘 아침 늦잠을 자고 있는데, 5살배기 아들 녀석이 어린이집에서 종이로 만든 예쁜 카이네션을 가슴에 붙여준다. 아주 이쁜 카네이션이다. 어, 참 이쁘게 잘 만들었네 하면서도 기분이 우째 좀 이상하다. 이제 내가 어버이날의 그 어버이가 되었나 싶은 것이 새삼 세월의 무게가 느끼지는 것이다.


이제껏 어버이날을 챙기기만 하다가 이제 내가 그 날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니 참 묘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 어버이날에 어버이로서 어버이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흔히들 자식을 낳고 길러 보면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내 자식을 낳고 길러가는 과정에서 요 어린것들을 위해서 내가 쏟는 정성의 크기만큼 부모님의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되는 것도 같다. 부모님들도 꼭 같은 심정으로 어린 나를 길렀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꼭 자식을 낳아야만 부모님의 사랑을 알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권정생 선생의 경우를 보면 알 수가 있다.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홀로 산 그분의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은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간 힘이기도 했고, 그의 문학의 원천이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런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우리에게 던져주는 그 무엇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는 “한평생 기다리시며 외로우시며 안타깝게” 살다 가신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을 담은 시를 한편 남겼다. 바로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이라는 시로, 그 시에는 비단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로 대별되는 고향의 정서와 선생이 지니고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느끼게 하는 ‘사람살이’에 대한 핵심을 어머니의 살아생전의 삶을 통해 그리고 그분이 살았던 마을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이 시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가 되는 것이리라.


5월 17일이면 그분이 돌아가신 지 2주기가 되는 날이다. 2007년 5월 평생을 함께한 지병은 비로소 그분을 자유롭게 놓아주었고, 권정생은 그렇게 영면한 것이다. 그래서 오월이 오면 권정생 선생 먼저 떠오른다. 그렇게 그는 우리들의 가슴에 참 어버이이자 스승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한번 소리 내어 꼼꼼이 읽어보자.

이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며 권정생을 추모하자.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어버이들의 따뜻한 사랑에 감사하자. 그래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 앞산꼭지 http://apsan.tistory.com/174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권정생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가 그렇게 살다 가시는 걸까.

한평생

기다리시며

외로우시며

안타깝게……


배고프셨던 어머니

추우셨던 어머니

고되게 일만 하신 어머니

진눈깨비 내리던 들판 산고갯길

바람도 드세게 휘몰아치던 한평생


그렇게 어머니는 영원히 가셨다.

먼 곳 이승에다

아들 딸 모두 흩어 두고 가셨다.

버들고리짝에

하얀 은비녀 든 무명 주머니도 그냥 두시고

기워서 접어 두신 버선도 신지 않으시고

어머니는 혼자 훌훌 가셨다.

어머니 가실 때

은하수 강물은 얼지 않았을까

차가워서 어떻게

어머니는 강물을 건너셨을까

어머니 가신 거기엔 눈이 내리지 않는 걸까

찬바람도 씽씽 불지 않는 걸까


어머니는 강 건너 어디쯤에 사실까

거기서도 봄이면 진달래꽃 필까

앞산 가득 뒷산 가득

빨갛게 빨갛게 진달래꽃 필까


어머니 사시는 집은 초가집일까

흙담으로 지은 삼간짜리 초가집일까

봄이면 추녀 끝에 제비가 집 지을까

둥우리에 암탉이 병아리도 깔가


어머니는 누구랑 살까

이승에 있을 때

먼 나라로 먼저 갔다고

언제고 언제고 눈물지으시던

둘째 아들 목생이 형이랑 같이 살까

아침이면 무슨 밥 잡수실까

거기서는 보리밥에 산나물 잡수실까

거기서도 밥이 모자라

어머니는 아주 조금밖에 못 잡수실까


어머니네 집 앞으로 골목길도 있을까

대추나무 섰는 우물이 있을까

두레박으로 물을 길으실까

물동이도 고만큼 예쁜 것으로 길으실까

왕골껍질로 만든 또아리를 받치실까

어머니는 거기서도 팔이 여위셨을까

물동이 내리실 때 부들부들 떨지 않으실까


디딜방아는 누구랑 찧으실까

목생이 형이 찧고

어머니는 확 앞에 앉아서 쓸어넣으실까

수수가루 빻아

오늘 저녁엔 수수팥단지 만드실까

이남박에 꼭꼭 떡 담으시고

모락모락 김나는 수수떡 담아 놓으시고

저 아래 먼 먼 이승에 두고 온 일준이랑

또분이랑 생각하실까

수수팥단지 잡수시다 목이 메여 우실까

호롱불빛을 비껴나

어머니는 돌아앉아 눈물 닦으실까


참나무 떡갈나무 잎이 피면

꾀꼬리가 자랑자랑 숲속에서 울까

어머니는 꾀꼬리 소리 들으며

산나물 뜯으실까

취동아리 뜯으시고

바디취나물 뜯으시고

뚝갈이, 미역취 뜯으시며

거기서도 어머니는 타령을 부르실까

꾀고리 우는 소리보다 더 구슬픈

타령을 길게 길게 부르실까


어머니 사시는 거기엔

전쟁이 없을까

무서운 포탄이 없을까

총칼을 든 군대들이 없을까

모든 걸 빼앗기만 하는 임금도 없을까

무서워서 하루도 한 시도

마음 못 놓는 날이 정말 없는 것일까

그래서 헤어지는 슬픔도 없는 것일까

정말 울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여름 뙤약볕이 쬐면

고추밭에 고추가 빨갛게 익을까

어머니는 목화밭 김도 매고

서속밭 김도 매며 바쁘실까

거기서도 어머니는 쉬지 않고

쉬지 않고 일만 하실까

어머니 얼굴은 거기서도 까맣게 그으르셨을까

주름살이 깊게 깊게 패이셨을까

어머니는 열무랑 나박배추 가꾸실까

고추 따서 다래끼에 담고

열무랑 나박배추 솎아 담고

어머니는 언덕길로 걸어서 집으로 가실까

고무신 아끼시느라 벗어 들고 걸어가실까

다래끼 무거우면 한 번 추슬렀다가

—후유우 하시며, 잠깐 섰다가 또 걸으실까


소낙비 내린 다음 날

말똥버섯 돋아나면 따다가 잡수실까

쪽으로 자개시고 끓는 물에 데쳐

국을 끓여 잡수실까

말똥버섯 국 끓여 놓고 앉아

—일준아……

—또분아……

그렇게 또 생각하실까


밤이면 달도 뜰까

둥글게 훤하게 달도 뜰까

앞마당 귀리짚으로 엮은 거적을 깔아 놓고

어머니는 삼바람 이으시며 밤을 지샐까

누구랑 앉아서 삼 삼으실까

거기 어머니 사시는 나라에도

진갑이네 어머니 같은 착한 이웃이 있을까

감자떡 나눠 잡수시며 걱정들을 나누며

함께 앉아 삼 삼으시며 밤을 지샐까


하얀 달빛에 실바람이 일고

초가지붕 위엔 박꽃도 필까

누나 얼굴 같은 하얀 박꽃이 필까

조롱조롱 애기박이 열리고

그렇게 또 가을이 찾아오는 걸까

바가지가 둥글둥글 굵어지는 가을이 오는 걸까

어머니는 사기요강에 오줌 받아

박넝쿨 구덩이에 부어 넣으실까

바가지 딴단하게 영글라고

오줌 받아 부으실까

바가지 타서 말리시며

어머니는 시집간 귀분이 생각하실까

친정나들이 오면 제일 이쁜 것 주고 싶어

거기서도 어머니는 딸 생각하실까

거기서도 추석이 있을까

설날이 있을까

어머니는 추석에도 외로우시겠지

어머니는 설날도 외로우시겠지

아직도 아들딸 이승에 두고 가셔

어머니는 문구멍까지 귀 기울이시며

눈물지으실까


어머니는 거기서도

바람머리 앓으실까

이앓이도 하실까

머리도 수건 두르시고

아픈 것도 애써 참으실까

겨울밤 어머니 방엔 군불 많이 지피실까

솜이불 두꺼운 걸로 덮고 주무실까

방바닥엔 삭자리 깔았을까

짚자리 가지런히 깔았을까

윗목에 물레실 자으시다가

어머니는 밤늦게 잠자리 드시는 걸까


어머니 사시는 나라에도

그리움이 있을까

애타함이 있을까

개똥벌레 날아가는 밤

귀뚜라미 우는 밤도 있을까

정지 부뚜막에 생쥐가 찍찍 울며 다닐까

뒷산에 부엉이가 와서 울까


장날이면 장보러 가실까

말린 고추 팔러 가실까

울양대 차좁쌀도 고만큼씩

올망졸망 가지고 가실까

동구 밖까지 삽살이가 따라오면

어머니는 주먹을 들어 으르시고

발로 탕탕 구르시고

그래도 안 되면

— 삽살아, 집에 가 있거라

— 집 잘 보고 있으면 착하지

삽살이는 알아듣고 못 이긴 척

서운하게 돌아서 텁썩텁썩 갈까


장에는 어떤 장수들이 있을까

개구리참외도 팔까

콧등에 하얀 테 두른

알룩고무신도 팔까

타래엿도 팔고 갱엿도 팔까

소금 장수도 저런 고등어 장수도 있을까

때깔이 예쁜 주발 장수도

항아리랑 단지랑 놓고 파는

옹기장수 할아버지도 있을까


어머니는 뚝배기 하나 사고

소금 조금 사고

개구리참외도 사실까

참외 사시면서도 이승에 두고 온

아들딸 생각 또 하시겠지

돌아오는 길에 소낙비도 내릴까

소낙비 내리면 무지개도 뜰까

청산 위에 색동빛 예쁜 무지개처럼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도

청산처럼 아름다운 산이 있고

중들 강물처럼 맑은 강물이 흐를까

거기 그렇게 예쁜 무지개 뜨면

어머니도 어린애처럼 즐거우실까

소낙비 맞고 옷이 젖어도

어머니는 무지개 쳐다보며 또 쳐다보며

비탈길을 동동걸음 걸어오실까

개구리참외는

목생이 형이랑 둘이서만 먹을까

거기서도 어머니는 찔름 들어간

못생긴 참외를 잡수시고

예쁘고 만난 건 아들 주실까

참외꼭지만 남기고 알뜰히 잡수실까


어머니는 자주자주 하늘 보실까

어머니는 자주자주 달 쳐다보실까

거기엔 정말 전쟁이 없었으면

빼앗아만 가는 임금도 없었으면

전쟁에 쫓겨 쫓겨 가지 않았으면

모두가 자유롭고 사랑이었으면

톳제비나 물레귀신 말고는

무서운 것들이 없었으면

거기에도 봄이면 진달래꽃 폈으면

꾀꼬리가 울었으면

골목길에 엄마닭이 병아리 데리고 다니고

감나무에 족두리 같은 꽃이 폈으면

창포꽃이 피고

그네 뛰는 단오날이 있었으면


응숙이네 머슴, 장수 아저씨랑

군마 할아버지 같은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살았으면

송아지도 있고 망아지도 있었으면

실개울엔 가재도 살고 우렁이도 살고

버들가지도 흔들리고 물총새도 날고

흰구름 동동 뜨고 제비가 날고

뻐꾸기가 자꾸자꾸 울었으면

아아, 거기엔 배고프지 않았으면

너무 많이 배고프지 않았으면

너무 많이 슬프지 않았으면

부자가 없어, 그래서 가난도 없었으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으르지도 않고 겁주지도 않고

목을 조르고 주리를 틀지 않았으면

소한테 코뚜레도 없고 멍에도 없고

쥐덫도 없고 작살도 없었으면


보리밥 먹어도 맛이 있고

나물 반찬 먹어도 배가 부르고

어머니는 거기서 많이 쉬셨으면

주름살도 펴지시고

어지러워 쓰러지지 말으셨으면

손목에 살이 좀 오르시고

허리도 안 아프셨으면

그리고 이담에 함께 만나

함께 만나 오래 오래 살았으면


어머니랑 함께 외갓집도 가고

남사당놀이에 함께 구경도 가고

어머니 함께 그 나라에서 오래 오래 살았으면

오래 오래 살았으면……


출처 : [우수카페]곧은터 사람들
글쓴이 : 앞산꼭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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