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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10초 안에 살인자가 될 수 있다

인체의 자율신경 가운데 교감신경은 비상시를 지배한다. 격한 운동을 하거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 신경계가 즉각 발동해 심장박동 수를 늘리고 혈관을 확장해 간이나 심장 같은 중요 기관에 더 많은 피가 흐르도록 한다. 반면 부교감신경은 평상시를 지배한다. 평소 장의 활동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체액 분비를 조절한다. 괄약근까지 관리해 예절신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두 신경은 한쪽이 활발하면 다른 쪽은 찌그러드는 앙숙 관계이다.

극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똥오줌을 못 가리는 것은 바로 이 교감신경이 활발히 작동한 탓이다. 교감신경은 생명과 직접 관계되는 장기에만 에너지를 집중한다. 사회에서 늘어져 지내다 군대 훈련소에 갓 입소해 기합이 바짝 든 신병이 오줌을 지려 종종 망신을 당하는 것은 바로 이 교감신경의 장난 때문이다.

강력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자기도 모르게 쉬를 하는 정도는 사실 애교에 속한다. 비상시에 인체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온갖 응급처방을 하는데 그것은 나중에 더 많은 문제를 부른다. 전쟁이나 장기 파업 상황을 겪은 뒤 많은 사람이 두고 두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성원 그림

1974년 박정희 정권의 언론 통제에 맞서다 회사 측의 배신으로 길거리로 쫓겨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회원들과 얘기해보면 그분들 역시 각종 질환에 시달려왔음을 알 수 있다. 이미 10%가 넘는 17명이 암과 같은 치명적 질환에 걸려 사망했다. 부교감신경이 억제되면 면역 체계 활동도 감소한다. 많은 분들이 찌르는 듯한 가슴 통증을 만성적으로 겪었다. 한번 화가 났다 하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고 하소연하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지하철에서 젊은 친구들과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거나, 고속도로에서 난폭 운전자와 욕하며 싸우다 수십㎞를 추적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대부분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서울 세종로사거리 동아일보 사옥 앞을 맨정신으로 지나치지 못한다. 심장이 벌렁거려 견딜 수 없는 까닭이다.


쌍용차 노동자, 폭력의 참혹한 결과


외상후스트레스가 어떤 참혹한 일을 빚을 수 있는지 생방송으로 보여주는 이들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파업 당시 경찰과 용역 깡패가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전쟁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겪었다. 노동자의 아내와 자식들은 가장이 곤봉과 군홧발에 무참히 꺾이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지금까지 노동자와 그들 가족 19명이 자살하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 누구나 10초 안에 살인자가 될 수 있다 > 폴 발렌트 지음, 생각연구소 펴냄

열네 번째 희생자가 나왔을 때 나선 이가 바로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이다. 그녀와 자원봉사자들은 지난 10월 경기도 평택에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정신 상담과 치유를 위한 센터 '와락'을 열었다. 그녀는 노동자 가족 중에서도 아이들 상담과 치유에 힘을 쏟는다. 직접 폭력에 노출된 노동자 못지않게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큰 손상을 입었으며 그 후유증이 오래 가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버스를 타지 못하거나(전경이 타고 다니니까), 칼·총·도끼 따위 온갖 장난감 무기를 밤이나 낮이나 차고 다니는(아빠를 때리려는 이들을 죽이려고) 식의 갖가지 증상을 보인다.

와락을 여는 데 드는 종잣돈을 댄 이들은 1980년대 국가 조작 간첩사건 고문 피해자 모임인 '진실의 힘'이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무서움을 직접 몸으로 겪어낸 그들은 대부분 넉넉지 못한 형편인데도 국가에서 받은 보상금 일부를 내놓았다. 군부 통치와 개발 지상주의에 가위눌려온 대한민국에는 외상후스트레스를 혹독히 겪는 무슨 무슨 유족회가 유난히 많다. 그들은 마치 유령처럼 우리 사회를 배회한다. 흔히 한국인의 주요 정서를 한(恨)이라고 하는데, 이 한이란 바로 외상을 입은 뒤 우리 마음속에 봉인돼 빠져나오지 못한 슬픔과 분노와 공포의 덩어리일 뿐이다. 한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우리 사회는, 정부는 19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이 잇달아 죽어나가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파업을 겪은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그 가족이 수천명에 달해 앞으로도 죽음의 행렬은 길게 이어질 텐데도.

헝가리 출신의 정신과 의사 폴 발렌트가 쓴 < 누구나 10초 안에 살인자가 될 수 있다 > (2011년, 생각연구소 펴냄)는 바로 트라우마가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40년간 수천 건의 상담과 임상경험을 했으며 그 자신 나치의 홀로코스트 어린이 생존자이기도 한 저자는 우리 마음속에 감춰진 파괴적인 상처의 정체를 잘 드러낸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들은 부모의 학대, 집단 차별,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 자연재해 등 홀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하면 그 상처를 서둘러 봉합한다. 몸 속 깊숙이 숨겨진 트라우마는 평상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다가 갑자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낮은 자존감부터 우울증, 무기력감, 지나친 폭력성,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과 불안, 분노에 이르기까지 트라우마가 변신한 모습은 실로 다양하다.

그가 산불 재해 지역의 피해자를 상담하고 치료한 기록이 인상적이다. 현장에서 본 불의 유머 감각은 섬뜩했다. 마치 주사위를 굴려 결정이라도 한 듯이 한 줄로 늘어선 여섯 채의 집 중 세 채는 불타고 나머지는 말짱한 것과 같은 식이었다. 뜻밖에도 처음 도착한 현장에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 천지였다. 집이 무사한 사람은 그 때문에 괴로워했다.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탄 것이 내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말했다. 게을렀던 자신의 집은 말짱하고 열심히 대책을 세웠던 이들의 집은 불탄 데 대해 미안해했다.

일주일쯤 지나자 사람들은 변덕을 부렸다. 갑자기 분노와 냉소가 마을을 덮었다. 많은 주민이 이웃과 봉사자, 그리고 정부에 화를 내기 시작했다. 복구에 열심이던 남자들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드러누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4주쯤 지나자 사람들은 온갖 증상에 시달렸다. 심장 질환, 가슴의 두근거림과 통증, 숨막힘, 천식, 온갖 감염, 월경 이상, 요통, 우울증과 불안감, 부부생활의 어려움. 아이들이 부모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밤에 오줌을 싸고, 비행을 벌이는 일이 부쩍 늘었다. 초기에 자기 방어를 위해 여러 가지 생존 전략을 동원했던 대가는 실로 혹독했다. 목숨을 건 헌신적인 소방대원들의 구조 활동, 그리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도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사후에도 여전히 적대적인 공권력과 마주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는 도대체 어떤 상태에 있을지 짐작하기도 힘들다.

도덕은 가해자의 것

트라우마 피해자는 자기가 마치 가해자인 양 자학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의 환자 중 한 명인 베벌리는 어려서 마을 불량배와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녀는 그 기억을 꽁꽁 봉인했고, 처음 저자에게 상담을 하러 왔을 때는 자신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는 잘 나가는 변호사이며, 세 자녀의 어머니로서 겉으로는 명랑하고 쾌활했지만 아이를 낳을 때마다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꽁꽁 동여맨 상처에서 고통과 슬픔이 시도 때도 없이 배어나왔던 것이다. 그녀가 죽을 기를 쓰고 기억을 봉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해자인 아버지가 끊임없이 어린 그녀를 '잡년'이라고 부르며 죄의식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래 자기가 헤프며, 불륜을 즐기는 부류라고 생각해 그 끔찍한 기억을 지웠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환자를 보며 도덕에 대한 순결을 잃었다고 말한다. 도덕이란 가해자의 논리에 불과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확대하자면 일본 군국주의가 조선의 당파 싸움을 비하하거나 부자가 가난뱅이는 본래 게으르다고 욕하는 따위가 바로 강자의 도덕이다.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박원순의 도덕성을 검증하려 들거나,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똑같은 가해자 심리가 아닐까. 베벌리는 악당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걸 분명히 깨달은 순간 지옥을 벗어났다.

문정우 대기자 /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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