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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시간

‘불온서적’ 저자들 “감사할 따름”

하루에 대여섯 권 팔리던 책이 어느 날 457권 나갔다. 하루 걸러 한 권 나가던 책은 하루 동안 128권 팔렸다. 2008년 8월, 온라인 서점 '알라딘'이 파악한 < 나쁜 사마리아인들 > 과 < 지상에 숟가락 하나 > 의 매출 성적표다. 당시 서점가의 때 아닌 특수를 도운 건 국방부였다. 이상희 당시 국방부 장관은 '군내 불온서적' 리스트 23권을 만들어 일제 수거를 지시했다. '아까운 걸작'이겠거니, 일찌감치 흥행을 단념했던 몇몇 출판사는 서둘러 재판을 인쇄했다. 그만큼 시장의 반응이 뜨거웠다.

3년이 지났다. 그때 그 '불온서적 리스트'는 어떻게 됐을까. < 시사IN > 이 입수한 2011년판 불온서적 목록을 보면, 이들 목록이 여전히 통용됨은 물론 책 종류가 오히려 크게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11년 8월 공군 소속 한 전투비행단장 명의로 발송한 이 공문에는 '장병 정신전력 강화에 부적합한 서적반입 차단대책'이라는 제목과 함께 총 42권의 책 리스트가 딸려 있다. 2008년 당시 '군내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23권에 19권이 새로 추가되었다.





ⓒ캐리돌 제작:시사IN 양한모, 사진:시사IN 윤무영

'장병 정신전력 강화에 부적합한 서적'은 '불온서적'을 대체하는 말이다.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불온서적 지정을 재검토하라고 권고한 뒤 국방부가 명칭을 바꿨다. 이들 도서는 3개 항목으로 분류돼 있다. △북한 찬양(11종) △반정부·반미(10종) △반자본주의(21종) 등으로, 2008년 리스트와 동일하다. 추가된 19권은 모두 '반자본주의' 항목에 속한다. 이 분야에 속한 책은 2008년 2종에서 2011년 21종으로 늘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 소금꽃 나무 > 는 2008년 '반정부·반미'에 포함된 데 이어 올해 '반자본주의' 분야에도 중복 포함됐다.

2008년 논란이 불거질 당시, 교양 인문 베스트셀러와 권장 도서, 대학 교재까지 불온서적으로 둔갑시킨 데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았다. 이번에도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대중 서적이 대부분이다. < 사다리 걷어차기 > < 나쁜 사마리아인들 > 등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장하준 교수(케임브리지 대학)의 2006년작 < 국가의 역할 > ,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최성각의 에세이 < 달려라 냇물아 > , 전태일의 일대기를 그린 위기철의 < 청년 노동자 > , 2007년 문화관광부의 학술 추천도서인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 교수의 < 비판적 평화연구와 한반도 > 등이 2011년 금서 목록에 들어갔다.

FTA의 득실을 따진 이해영 한신대 교수의 < 낯선 식민지 한미 FTA > , 카지노를 배경으로 한 소설 < 슬롯 > 도 새로 포함됐다.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 신은경 전 아나운서의 에세이 < 사랑이 뭐길래 정치가 뭐길래 > 도 눈에 띈다. 이 책은 절판돼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저자들 "황당하지만 영광"

리스트에 오른 책의 저자들은 '황당하지만 영광'이라는 상반된 반응을 동시에 보였다. 미국의 세계적인 언어학자 놈 촘스키와 함께 단일 저자로는 나란히 2관왕을 차지한 장하준 교수는 2008년 < 나쁜 사마리아인들 > 에 이어 < 국가의 역할 > 을 새로이 리스트에 올렸다. < 국가의 역할 > 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학술적으로 성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 교수는 "장병들의 독서 수준이 높아졌나보다. 옥스퍼드 대학의 학술 논문이 담겨 있어 읽기에 만만치 않은 책이다. < 나쁜 사마리아인들 > 도 쉬운 책이 아니었는데 그걸로 기초를 다지고 < 국가의 역할 > 로 굳히기를 할까 걱정하는 국방부의 배려가 담긴 것 같다"라며 비꼬았다.

<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 의 공저자이자 < 길에서 만난 사람들 > 저자로 이번 목록에 두 번 이름을 올린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은 2008년 당시보다 더 황당하다고 했다. 2008년 지정된 <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 는 그나마 사회체제를 비판하는 언급이 있었지만 이번에 새로 목록에 오른 < 길에서 만난 사람들 > 은 휴먼 다큐멘터리 형식의 사람 이야기다. 하 소장은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썼을 뿐이다. 그분들은 체제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나보다"라고 말했다. 이 책 이외에도 < 소금꽃 나무 > < 노동의 역사 노동의 미래 > < 청년 노동자 > 등 노동 관련 서적 4권이 반자본주의 서적으로 분류되었다.

후마니타스 출판사 '3관왕' 영예

추가된 리스트 중 유일한 소설인 < 슬롯 > 은 2007년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다. 카지노를 배경으로 거대한 노름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다양한 군상을 다뤘다. 작가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담긴 책이 맞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황당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대체 자본주의를 그리지 않은 책이 어디 있나"라고 되물었다. 이로써 금서 목록에 오른 소설은 총 2권이 되었다. 제주 4·3항쟁을 배경으로 다룬 현기영의 자전적 소설 < 지상에 숟가락 하나 > 는 2008년 목록에 올랐다.

< 달려라 냇물아 > 의 저자 최성각 풀꽃평화연구소장은 관련 소식을 전하자 깔깔깔 웃었다. 이어 "고약한 시대에 쓸데없는 짓을 하는 권력 종사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배척받게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나를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으로 키워주신 아버님 산소에 가서 얼른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의 책은 생태·환경 등 본인의 관심사를 다룬 에세이로, 도서출판 창비에서 출간한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내용 일부가 실렸다. 2007년 문화관광부 교양 추천도서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본인 책의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되는지 되물었다. 하지만 관련 기준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2008년 당시 문제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국방부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군대에 책보내기 운동을 계획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해당되는 23권을 모두 반입금지 도서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내부에서 선별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총련은 해당 사실을 부인했다.

이처럼 선정 기준은 모호하지만 선호하는 출판사 성향은 뚜렷하다. '후마니타스'는 전체 목록 중 < 소금꽃 나무 > < 비판적 평화연구와 한반도 > < 길에서 만난 사람들 > 3종을 출간해 불온서적을 가장 많이 만든 출판사가 되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영광이지만 제대로 읽고 결론을 내렸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평화·노동 등 따뜻한 시각에서 사회에 기여할 만한 내용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군이 웃음거리밖에 안 될 짓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선호하는 출판사는 615(3권), 녹색평론사(2권)와 당대(2권), 선인문화사(2권), 부키(2권) 등이다.

2008년 < 나쁜 사마리아인들 > 로 많은 판매고를 올린 '부키'는 이번 금서 목록을 아쉬워했다. 박윤우 부키 대표는 "발표 당시 책이 평소보다 10배 이상 팔렸다. 이번 건 좀 어려운 학술서라 출판사로서는 좀 아쉽다"라고 말했다. 당시 인터넷 서점 알라딘과 예스24는 불온서적 기획전을 만들고 독서감상문 대회를 열기도 했다. '불온도서를 읽는 사람들의 놀이터'라는 인터넷 카페가 생겼다. 카페 회원들이 놈 촘스키에게 공개 질의서를 보내기도 했다. 촘스키는 답변서에 "금서 조처를 영광으로 여긴다"라고 썼다.





국방부·공군 "공문 내린 적 없다"

이번 문건의 관련 규정이나 근거·개요·대책 등은 지난번 것과 거의 동일하지만 서적 목록은 더 허술한 대목이 적지 않았다. 리스트에는 < 민주화 세계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 > 와 < 대안체제 모형을 찾아서 > 가 각각 별책으로 구분돼 있는데, 실제 출간된 서적은 '함께 읽는 책'에서 출판한 < 민주화 세계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와 대안체제 모형을 찾아서 > ( < 민주화 세계화 > ) 한 권이다. 또 < 6·25전쟁과 북한의 만행 > 은 시중에서 찾을 수 없었다. 다만 2007년 사천시재향군인회가 소책자 형식으로 만든 만화 중 동일한 제목이 있다. 제목만 보면 북한의 만행을 고발한 책 같은데 권장도서가 아닌 불온도서로 분류된 이유를 알 수 없다. 장하준 교수의 < 국가의 역할 > 은 < 국가의 역활 > 로 잘못 표기되기도 했다.

이번 문건에 대해 국방부와 공군본부는 각각 그러한 공문을 내린 적이 없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2008년 목록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를 추가해 내려보낸 적은 없다"라고 밝혔다. 공군본부 정훈공보실 한 관계자는 "업무를 담당하는 국방부 정신전력과에 확인해본 결과 (이런 목록을) 만든 적도 없고 만들 예정도 없다고 알려왔다. 국방부에서 지시를 내리지 않는 이상 공군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그런 걸 만들기에는 선정 기준도 모호할뿐더러 역량도 안 된다"라고 밝혔다. 선정적인 간행물이나 두드러지게 북한을 찬양한 책은 걸러낼 수 있지만 시중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을 금서목록 형태로 만들기는 힘들다는 것. 이 관계자는 나아가 '상부의 트렌드나 취지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다만 문서가 사실이라면, 부대 차원에서 개념 없는 담당자가 빚은 해프닝 정도일 것이다"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최강욱 변호사는 우려를 나타냈다. '불온서적'과 관련해 헌법소원을 냈다가 징계를 받은 군법무관들을 변호하고 있는 그는 "3년 전 크게 무리를 빚었는데 군 내부에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말인가. 상부 지시 같은 절차 없이 언제라도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소리로 들린다. 무엇보다 군 내부에서 누구는 인권침해를 받고 누구는 안 받고, 군대 안의 차별이 가능한 상황이라서 더 황당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공군에 복무 중인 한 사병은 "단지 자본주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장병들의 도서 선택 폭을 제한하는 건 문제가 있다"라고 말했다.








< 가난에 빠진 세계 > 는 빈곤이 전 세계에 만연한 문제이자 사회 구조와 연관된 문제임을 환기시킨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가 쓴 < 낯선 식민지 한미 FTA > 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득실을 따진 책이다. 카지노를 배경으로 한 소설 < 슬롯 > 도 새롭게 불온서적 목록에 포함되었다. < 달려라 냇물아 > 는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생태·환경 에세이다.

"개인이 벌인 해프닝으로 보기 어려워"

더욱이 < 시사IN > 이 입수한 공문에는 9월1~13일 이들 서적에 대한 일제 점검을 실시한다는 지시가 담겨 있다. 최 변호사는 "발신자가 전투비행단장이고 수신자는 그에 소속된 몇 개의 예하 부대라면 한 개인이 벌인 해프닝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소설가 현기영은 4·3항쟁을 다룬 < 순이 삼촌 > 을 쓰고 온갖 고문을 당했다. 2008년 당시 역시 4·3항쟁을 다룬 < 지상에 숟가락 하나 > 가 '불온서적'으로 지정됐을 때 '지난 20년의 민주화 과정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개탄했다. 청년 시절부터 20년간 수감 생활을 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이번 목록에 새로이 이름을 올린 < 민주화 세계화 > 의 공저자다. 그는 "나로서는 새삼스러울 게 없다. 불온서적이란 기준 자체가 자의적이고, 지금까지 다양한 기준과 자의적인 잣대로 나를 재단해왔다. 이것도 그중 하나다"라고 담담하게 소회를 밝혔다.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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