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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보는 오후>/우리나라 드라마소식

<추적자>는 <질투>에서 시작됐다

한국 대중예술사의 1990년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1992년, 텔레비전 드라마사의 변곡점에는 MBC < 질투 > 가 놓여 있다. 몇 년 전부터 실험해오던 16부작 미니시리즈가 대세로 정착하는 시점이었다. 20년 전 < 질투 > 가, 지금 막 인기를 모으고 있는 < 추적자 > 같은 드라마와 꽤 큰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 1980년대까지의 드라마 역사가 < 질투 > 로 변화를 겪지 않았다면 지금의 < 추적자 > 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질투 > 로 대표되는 1990년대 미니시리즈는, 세 가지 점에서 그 이전까지 보여온 드라마 관습의 고리를 끊었다. 1960년대 초 녹화기도 편집기도 없이 생방송으로 드라마를 제작했던 시대를 넘어서서 1970년대 초 < 아씨 > < 딸 > < 여로 > 를 계기로 텔레비전 일일 연속극 시대가 열린다. 이로써 연간 200편 이상 제작되던 한국영화 전성기가 끝장 날 정도로, 텔레비전 드라마의 시대를 연 일등공신은 일일 연속극이었다. 따라서 우리 드라마는 오랫동안 일일 연속극의 특성을 유지해왔다. 1980년대 김수현의 전성시대를 거치며 다소 흔들린 이 일일극의 특성은, 1991년 대작 < 여명의 눈동자 > 와 1992년 미니시리즈 < 질투 > 를 계기로 확실히 올드패션으로 밀려나게 된다.

소수 인물을 중심으로 한 빠른 전개

첫째, 소수 인물을 중심으로 한 빠른 사건 전개가 확립되었다. 일일극은 1회 30분 내외, 100~300회 정도의 길이로 제작되므로, 선 굵은 갈등(대립) 축을 설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극을 일관되게 전개하는 구성을 갖기보다는, 일상 속에서 만들어지는 자잘한 삽화적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인물은 많고 대립은 집약적이지 않고 사건은 아주 느리게 전개된다. 3대 이상의 대가족, 혹은 < 달동네 > 처럼 늘 모여 사는 이웃들이, 남의 일에 온갖 간섭을 하면서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며 벌이는 삽화를 나열하는 식이다. 가지 많은 나무이니 바람 잘 날이 없고 장면은 그것들을 일일이 반복적으로 따라다닌다. 그에 비해 대작 드라마와 미니시리즈는 갈등을 담당하는 소수의 인물만을 설정하여 사건을 힘 있고 빠르게 밀어붙인다.





< 질투 > 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변곡점이다.

둘째, 스튜디오 세트를 과감히 벗어난 촬영이 확립되었다. 1980년대까지의 일일극은 주로 방송국 안의 스튜디오 세트에서 촬영되었고, 방안은 물론 골목길 장면조차 실내 스튜디오 세트를 이용했다. 그러다 보니 카메라는 안방 시부모와 건넌방 아들 내외, 아랫방 셋집 식구와 구멍가게 아줌마의 공간에서만 뱅뱅 돈다. 그런데 < 질투 > 에서는 그저 사랑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대학 캠퍼스와 오피스빌딩의 구석구석, 놀이동산과 피자 가게, 찻길을 시원스럽게 보여주었다. 그러다보니 사건 역시 가정 내 갈등을 과감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기술의 발전으로 현격하게 높아진 화질이 가능해짐으로써 뮤직비디오 같은 미장센을 즐기는 장면을 삽입하는 관습이 확립되었다.

셋째, 신파적 미감이 청산되었다. < 아씨 > 와 < 여로 > , < 딸 > 과 < 외아들 > 등에서 확립된 가정 내 현모양처 이야기, 수난당하지만 참고 견디는 인고의 여성 주인공을 깨끗이 날려버렸다. < 질투 > 의 최진실은 작가인 엄마 밑에서 자유주의적으로 성장했고, 남자친구 최수종보다 똑똑하고 당차게 직장생활을 잘 해낸다. 단지 이들 사랑의 걸림돌은, 순종적이고 다소곳한 여자와 믿음직한 남자라는 기존의 고정된 젠더 관념이고, 결국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둘은 친구 같은 부부가 된다. 시집가서 시부모 앞에 무릎 꿇는 삶은 절대로 살지 않을 것 같은 이 새로운 남녀의 이야기, 특히 자신의 사회적 성취욕과, 동등한 부부관계에 대한 욕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새로운 여성상이 드라마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는 여성들이 자신의 의지와 욕망대로 움직이며 사건을 추동하는 시대였다. 1998년부터 열린 외환위기의 시대에 이르러 < 토마토 > < 이브의 모든 것 > 등에서는, 사랑뿐 아니라 직업적 성공을 위해 악행도 마다않는 악녀 캐릭터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 질투 > 10년 후인 2002년 그 바람은 사극으로 옮아 붙었다. < 여인천하 > 의 징검다리를 딛고 < 대장금 > 에 이르러, 눈물 흘리며 석고대죄를 일삼던 사극 속의 여성들은 이제 자신의 야망을 위해 노력하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성장하는 직업인으로 변모했고, < 선덕여왕 > 에 이르러 여성 정치 지도자를 라이벌이자 멘토로 삼아 '삼한일통'의 실현을 꿈꾸며 왕에 오르는 파워우먼을 그려내기에 이르렀다.





< 추적자 > 는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제를 사회적 정의로 확장했다.

지금 < 추적자 > 같은 드라마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이런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중 밤 10시대에 텔레비전 앞에 앉는 시청자들은, 이제 더 이상 남녀 간의 사랑과 가족 간의 우애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물론 일일극, 아침극, 주말극의 일부에서는 아직도 대가족이 가정 내에서 살아가며 벌이는 자잘한 사건들을 스튜디오 세트 중심으로 그려내는 옛 관행이 유지되고 있기는 하지만, 드라마의 트렌드는 주중 밤 10시대의 드라마가 이끌고 있다). 이들의 체험 영역과 꿈은, 사랑과 가족을 훌쩍 넘어선다. 직장 내 파워게임,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망, 이를 넘어선 정치와 사회적 정의에 대한 관심 등으로 확대되어 있는 것이다. < csi > 등 미국 드라마 바람은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한 계기가 되었다.

초기에는 병원에서 연애하기, 경찰서에서 연애하기 식으로, 사회 영역이 그저 껍데기로만 결합되는 양상을 보이다, 급기야 최근 몇 년에 걸쳐 드라마 창작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대중적으로 끌어가는 기법을 알아낸 듯하다. 그것은 바로 추리적 요소의 도입이다. 이제 주중 드라마에서 추리적 요소는 거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즉 연애와 가족사에만 몰입해 인물 간의 감정적 관계에만 치중해온 여태까지의 관행을 극복할 필요를 느꼈고, 그 돌파구가 바로 범죄와 추리인 것이다.

그러나 역시 한국의 드라마답게 이들 작품은, '미드'가 보여주는 두뇌게임의 차가운 질감과 다른, 개인적 원한과 권력형 비리에 얽혀 분노와 눈물이 뒤범벅되는 뜨거운 이야기로 채워진다. 총선과 대선의 열기로 달아오를 수밖에 없는 2012년 한복판의 < 추적자 > 는 그 결정판인 셈이다.

이영미 (대중예술 평론가) /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20810104024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