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등 아시아의 방송작가들과 모여 세미나를 하면 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원작을 창작하는 한국 작가들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한류의 원천인 창작성이 사라지는 것 같아 걱정스러워요." 2010년 대본집 < 거짓말 >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노희경 작가가 한 말이다. 같은 자리에서 후배 드라마 작가들의 순수 창작을 독려했던 그녀가 일본 드라마 TBS <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 > 의 리메이크 작 SBS < 그 겨울 바람이 분다 > ( < 그 겨울 > )로 공중파에 복귀했다.
시청률로 고전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낙인이 찍혔음에도 드라마 판의 다양성을 고민하고 질적 수준을 높인 긍지 높은 이가 겨우 3년 만에 스스로 '일드' 각색에 나섰으니 자연히 번잡스러운 생각이 스친다. 한류 열풍이면 뭐 하나. 드라마 제작 규모는 커졌지만, 스태프들의 임금이 체불되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판국이니 노희경조차도 일정 규모의 성공을 고민하지 않고 드라마를 쓸 수 없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취재차 방송국 PD 사무실을 찾았을 때 캐비닛 가득히 수집된 로맨스 소설 원작들을 본 일이 있다. 방송사가 '되는 드라마'에 매달린 것이 이미 오래였으니 노희경 작가가 앞서 간담회에서 한 말들도 따지고 보면 방송사 쪽에서 귓구멍을 열어야 할 일이다.
ⓒSBS 제공 극중에서 상속녀 오영(송혜교·오른쪽)과 그녀의 오빠 행세를 하는 오수(조인성). |
여러 인터뷰나 에세이에서 노희경 작가는 천착하는 것들의 원인을 찾고, 새로 깨닫고 영향을 받은 것들을 이야기하는 데에 늘 스스럼없었다. 단지 어떤 것이 좋았다는 수준의 취향을 말하는 것을 넘어 현업 드라마 작가로서 미국이나 일본 드라마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은 계기나 특정 작품에서 받은 충격을 수용하고 자신의 극작을 발전시켰음을 밝힌 적도 있다. 다중 주인공에 미스터리 형식을 골조로 한 KBS < 굿바이 솔로 > 나 방송사 드라마국을 둘러싼 주인공들의 일과 인간관계를 회별 에피소드의 매듭을 지어가며 진행한 < 그사세 > 는 그녀가 '미드'를 어떻게 소화해냈는지 보여준다. 이른바 '러브라인'이라고 불리는, 누가 누구와 엮이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드라마 팬덤의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 그사세 > 는 시청자가 주준영(송혜교)의 자리에서 정지오(현빈)의 처지로, 이기적인 손규호(엄기준)의 시점을 지나 또 다른 인물들의 내밀한 속사정을 거쳐 그들이 일하고 사랑하고 갈등하는 세상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구조를 짜 올렸다.
원작과 달리 끈적끈적한 오누이?
기어코 서로를 연민하고야 마는 노희경 작가의 지난 드라마 속 인물들에 때로는 숨이 막히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일터라는 배경과 각 에피소드별 구조로 확보된 각자의 거리와 접점을 통해 소통하는 < 그사세 > 의 변화가 아주 반가웠다. 그리고 노희경 작가의 변화를 즐겁게 기다리던 쪽이었지만 < 그 겨울 > 은 참으로 난감한 드라마였다. 감정이입을 극대화하는 클로즈업 샷과 감정이입을 홀딱 깨는 노골적인 PPL(간접 광고) 사이에서 '이게 뭔가' 싶은 기분을 떨어내면 분명 흥미로운 지점이 보이긴 한다.
먼저 원작은 막대한 빚을 떠안고 목숨을 위협받게 된 신주쿠 가부키초 넘버원 호스트 레이지(와타베 아쓰로)가 눈이 보이지 않는 상속녀 아코(히로스에 료코)의 가짜 오빠 행세를 하며 유산을 노리는 간단하고 강력한 설정과 두 주인공의 심리극에 초점이 맞춰진 드라마였다. 레이지가 감정을 숨기고 더 이상 오빠 연기를 할 수 없게 되면서 그전까지 팽팽하던 두 사람간의 서스펜스는 신파로 전환된다. 그리고 복선으로 극 군데군데 점을 찍던 레이지와 아코의 주변인들은 이야기의 피날레 즈음에서 감춰뒀던 어두운 속내를 밝힌다.
원작의 주인공인 레이지가 세상의 규칙보다 훨씬 가혹한 유흥가 안에서 최고가 되었던 신화적인 남자라는 '설정'을 구현한다면, < 그 겨울 > 에서 직업이 바뀐 포커 겜블러 오수(조인성)는 육체적 고통이나 공포에 훨씬 인간적으로 반응한다. '표면상으론 오누이'라는 설정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도 재밌다. 오빠라는 역할 안에서 운신하던 레이지와 달리 오수와 영은 시작부터 누가 봐도 연인 사이로 보인다. 그들의 주변인 모두에게 오누이 이상의 분위기를 다 들키고 마는데도 둘만 여전히 '이 정도는 오누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듯 연인이나 할 법한 일상을 이어간다.
기본 설정이나 갈등관계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정반대 방향의 긴장을 만들어내는 < 그 겨울 > 은 원작이 설정과 기능적인 역할 안에 가둬두었던 캐릭터들의 인간다운 반응이나 고민을 거의 모두 열어젖힌다. 사람이니까 사랑의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의심하며,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짓을 나무란다. 원작의 빈틈을 메우고 해석하는 것은 분명히 흥미롭고 각각의 사람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노희경답다.
그런데 난감함은 6회를 지나 캐릭터가 점점 더 인간적인 방향으로 변화를 겪어갈수록 짙어졌다. 오수를 예로 들어보자. 그가 잠자는 영의 입술 근처에 자꾸 접근하는 것도 반복되면 어쩔 수 없이 구차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걸 보여주는 장면은 늘 근사하다. 절박하게 무릎을 꿇어도, 침을 튀기고 피가 흐르게 얻어터져도, 염치없는 말을 해도 근사하니까. 이젠 오수의 무너진 모습도 허세처럼 보일 지경이다. 아름다운 화면을 위해 최고의 앵글을 뽑아내는 제작진의 수고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았다. 화면에서 느낄 수 있는 생활감이 제로에 가까워도 그것을 저 세계의 묵약이라 생각하면 금방 익숙해지니까. 하지만 캐릭터들이 점차 설정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통의 인간다운 면모를 드러내면서 극단적으로 통제된 인공의 세계와의 갭을 느끼게 되어버렸다. 그저 남은 5회에 숨통이 트이길 바랄밖에.
유선주 (TV 칼럼니스트) /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30404011013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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