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취업주부 4년, 전업주부 10년, 파트타임주부 30년 동안 시간이 어찌 가는 줄도 모르고 아들 셋을 키웠다. 그리고 이제 손자, 손녀 여섯을 둔 7년 차 할머니가 됐다. 스스로 잘 커준 아들 셋 덕분에 엄마로서 책 한 권을 쓸 수 있었지만, 할머니가 되고서야 비로소 진짜 자식 키우는 얘길 하고 싶어진 걸 보면 뒤늦게 깨달은 것이 참 많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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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임승차였죠. 아이들 잘 키운 엄마라는 타이틀 말이에요. 그럼에도 한때는 주변에서 절 치켜세우면 겉으로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속으론 우쭐해하곤 했죠(웃음). 하지만 지금요? 어디서 아들 셋 서울대 보낸 엄마니, 뭐니 하면서 인터뷰하자면 천리만리 도망가기 바빠요."
너무 민망해서란다. 나는 아이들 이렇게 키웠다, 저렇게 키웠다 책까지 낼 때는 언제고 새삼 그런 말 말라며 천리 밖으로 줄행랑이니 거절당한 쪽이 되레 황당하기 일쑤라고. 하지만 정말 민망한 걸 어찌하느냐며 이제야 사람이 된 탓이라며 웃는다. 17년 전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책을 펴냈을 때만 해도 스스로 꽤 괜찮은 엄마 노릇을 했던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고 박혜란은 고백했다. 사실 세 아들을 서울대에 보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 하다 보니 세 아들이 모두 서울대에 진학하게 됐고, 사람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키웠는지 그녀에게 이야기해줄 것을 채근했다. 어찌 보면 반 강제로(?) 집필을 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나는 이렇게 키웠다가 아니라 믿는 만큼 지들 스스로 자랐다고 제목을 지었어요(웃음). 아이들 잘 키운 비법이 여기 있다며 내 기억 속에서 뭔가 그럴듯한 것들을 끄집어내 늘어놓았죠. 그런데요, 시간이 지나고 우리 아이들이 나이를 먹고, 손주들이 태어날 때마다 제 마음속에서 아쉬움이나 부끄러움 같은 감정이 자꾸 꾸역꾸역 올라오는 거예요."
박혜란은 반성문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손주들 덕분에 요즘 아이들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하게 되면서부터다. 나름 행복하고 재미있게 아이들을 키웠다 자부하는 그조차 자식 키울 때 더 잘하지 못해 후회되는 일들이 생각나는 것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하루하루를 아이들과 씨름하며 당장 아이 키우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젊은 부모들이 안쓰럽고 안타깝게 느껴져 '만약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꼭 해보고 싶은 것들'과 '다시 아이를 키워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손자, 손녀 여섯을 둔 할머니가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펜을 들어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을 펴냈다.
아이 키우는 즐거움, 사치가 아니다
"그야말로 지금 알았던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미숙한 엄마의 뒤늦은 후회랄까? 이만큼 살아보니 아이들 키우는 시간이 정말 잠깐이더라고요. 인생에서 그토록 재미있고 보람찬 시간은 또 없을 거예요. 그러니 비장하게 날세워 키우지 말고 마음 편하게, 쉽게, 재미있게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자식이 아닌 손주 보듯 말이에요(웃음)."
제아무리 자녀들을 번듯하게 키웠다고 자부하는 엄마라도 시간이 흐르면 아쉬움이나 후회가 있게 마련이다. '지금 알았던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기에 박혜란의 때늦은 육아 반성이나 육아 조언은 반가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손주 보듯 아이를 키우라니! 스멀스멀 반감 아닌 반감이 올라온다. 다 끝낸 자의 나른함 같고, 다 가진 자의 여유 같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다 잘 풀렸으니' 할 수 있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몇몇의 여성학자 중 한 명으로 자신의 일에서도 성공을 거뒀고, 다복하게 아들 세 형제를 두었으며, 이 아들들이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게다가 세 아들 중 하나는 요즘 신귀족층이라 불리는 연예인, 즉 인기 가수가 됐다. 잘된 정도가 아니라 특별하다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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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처럼 키우라는 박혜란의 조언 속에는 육아를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 젊은 엄마들에 대한 안쓰러움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박혜란은 말한다. 아이 키우는 즐거움은 결코 사치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엄마만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행복 중 하나일지 모른다. 내 아이를 키울 때는 부모도 아직 젊어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데다 아이들의 미래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하고 걱정과 욕심이 앞서다 보니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즐길 여유를 가질 수도 없다.
"저도 우리 아이들 키울 때 많이 힘들었어요. 소신을 나름 지켰다고 자부하지만 외부로부터의 공격, 내부로부터의 고민이 왜 없었겠어요. 그런데요, 손주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 욕심이 안 나요. 그저 아무 탈 없이 착하고 튼튼하게 자라면 그것으로 족하다 싶어요. 모든 것이 다 지나가듯이, 육아도 잠깐이에요. 즐기세요. 그 귀한 시간을 걱정으로 채우지 말고요."
손주처럼 자녀를 대하라는 말의 행간에는 교육적으로 많은 효험이 담겨 있다. 육아를 즐기고 그 안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엄마밑에서 자란 아이는 굳이 전문가가 나서서 설명해주지 않아도 바르게 클 것이라는 것은 예측 가능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애들 저녁 제대로 못 챙기는 게 죄?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반찬거리를 사들고 귀가하다가 아파트 마당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어요. 그 동창이 진지한 표정으로 제게 충고를 하더라고요. 엄마가 자기 일 하겠다고 아이들 저녁을 제대로 챙기지 않는 건 죄라고요. 정작 우리 애들은 불평 한마디 없는데, 졸지에 전 죄인이 됐더라고요."
때는 세 아들 중 막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이었다고 한다. 이제 어느 정도 아이들을 다 키웠으니 나도 내 일을 찾겠다며 사회로 나간 것이다. 귀가 시간은 불규칙했고 저녁은 늦어지기 일쑤였다. 동네 엄마들은 박혜란을 가리켜 '나쁜 엄마'라고 수군거렸다. 그나마 친한 동창이 그녀에게 한 소리는 '죄인'이라는 말이었다. 당시의 기준으로 박혜란은 '나쁜 엄마'였다. 큰아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거의 20년 동안 그는 주위로부터 엄마 노릇을 못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키우다가는 땅을 치고 후회할 거란 애정 어린 경고부터 "공부 잘했던 엄마가 자기 애들은 참 못 키운다"라는 말까지 말이다. 심지어 "저 엄만 아이들에게 너무 인색해"라는 인신공격까지 받았다. 나름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세상의 기준과는 참 동떨어져 있던 탓도 컸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좋은 엄마란 '아이를 남 보란 듯이 키워 최고 대학에 입학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엄마는 자신의 시간과 마음, 경제적인 부분까지 그야말로 올인해야 하고 말이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나쁜 엄마 맞죠(웃음). 첫아이를 한글도 못 깨친 채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지, 학교 담임에게까지 과외를 시킨다는 무용담이 떠돌 때 독야청청 과외 무용설이나 늘어놓으며 안 시켰지, 남들은 애들 기죽이면 안 된다며 비싼 브랜드 옷이나 신발 사줄 때 전 늘 동대문표 사 입혔지 등등 말이에요."
더욱이 본격적으로 대학 입시 대장정에 들어선 아이들이 있는 엄마가 자아를 실현해보겠다고 일까지 시작해버렸으니, 이기적인 여자는 애초에 엄마가 되지 말았어야 옳다는 극단적인 말까지 안에서 밖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박혜란이 보통의 엄마들처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엄마 노릇'을 아예 안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그 나름 무척이나 열심히 엄마 노릇을 했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자유롭게 놀게 하고, 공부하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고, 늘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대했으며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과 즐겁게 칼싸움을 하며 바쁘게 엄마 노릇 중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와도 아이들을 절대 비교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아이들이 집에 오더니 다른 집 엄마 얘길 하는 거예요. 그 집 엄마가 과일을 예쁘게 깎아서 예쁜 접시에 담아서, 예쁜 냅킨까지 준비해주었다나? 우리 아이들로서는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을 거예요(웃음). 나는 애들 친구가 와도 '냉장고에 사과 있다!'가 끝이니. 하지만 전 말했죠. 나도 너희들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한 적이 없으니 너희들도 비교하지 말라고."
좋은 엄마와 성공한 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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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인생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관리하는 매니저 엄마를 비롯해 타이거 엄마, 헬리콥터 엄마가 어쩌면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 더 맞는 좋은 엄마일지 몰라요. 그런 엄마 노릇이 적성에 맞는 엄마도 있을 거고요. 제 말은 그런 엄마 노릇에 저항을 느끼면서까지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명목하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따르지는 말라는 거예요."
세상에는 온갖 육아법들이 넘쳐난다. 그야말로 쏟아져 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전문가가 추천하고, 연구 결과가 뒷받침하고, 많은 사람들이 효과를 보았다고 한들 엄마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육아법이라면 그것이 실효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고 박혜란은 말했다. 되레 엄마와 아이에게 혼란만 가중시키기 십상이다. 어떻게 아이를 키울 것인가는 결국 엄마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다. 남들이 어떻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가는 참고사항일 뿐 그것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박혜란이 생각하는 좋은 엄마란 무엇일까. 아들 셋을 키운 엄마로서, 손주 여섯을 본 할머니로서 사는 오늘에 있어서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엄마에 대해 책에 아홉 가지를 써놓았어요. 아이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고맙게 생각하는 엄마, 아이를 끝까지 믿어주는 엄마,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엄마, 아이의 생각을 존중하는 엄마 등등 말이에요. 저도 노력을 한다고 했는데, 애들 말을 들어보면 그조차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구나 하는 실수, 후회, 반성 많아요."
박혜란은 좋은 엄마와 더불어 성공한 아이에 대한 기준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좋은 엄마보다 성공한 아이에 대한 잘못된 우리의 평가가 엄마와 아이 모두를 괴롭게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 아이들이 성공했다는 것이, 잘 컸다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지금도 그가 아이들을 키우는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한다. '일류 대학에 합격하는 것' 말이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아이가 밝게 자라서 지 밥벌이하고 살면 잘된 것 아닌가요? 좋은 대학, 좋은 직업도 좋겠지만… 좋다는 건 또 뭔가요? 자기가 가서 원하는 공부 하면 좋은 대학인 거고, 하고 싶은 일 하면 좋은 직업 아닌가요? 제 형제 중에 저만 공부를 했어요. 하지만 다른 형제들이 더 잘 살거나, 더 인품이 좋거나, 더 행복하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또 그들이 나보다 못하냐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니고요."
박혜란은 다시 한번 좋은 엄마와 성공한 아이에 대한 정의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대학 입학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것들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할머니가 되고 보니 그렇게 흘려보내는 시간들이 더없이 아깝다. 아니 안타깝다.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만 1세가 되기도 전부터 영어 노래를 듣고, 학습으로 전락한 놀이로만 노는 요즘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말이다.
"인생은 장거리 경주예요. 초반부터 전력질주하면 그만큼 빨리 방전돼요. 아이들이 어릴 때 밀어주어야 할 것은 학습 능력이나 인지 능력이 아니라 공부건 놀이건 '즐기는 법'이에요. 적어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놀게 해주세요. 여기서 제가 말하는 '논다'가 결코 책 한 번 들춰보지 않고 공부 안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박혜란이 말하는 좋은 엄마의 조건들과 젊은 엄마들에게 들려주는 몇 마디 육아 조언만 들어봐도 그가 왜 자녀는 '손주' 보듯 하며 키우라고 하는지 알 듯했다. 책 속에 쓰인 다른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아이를 욕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예뻐해주며,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부담을 떨쳐내보자는 표현을 하기에는 '손주'만 한 비유가 없어 보였다. 그 역시 진짜 할머니가 돼서야 깨달은 것이다.
"요즘 엄마들에게 배우고 싶은 거요? 먹을거리 신경 쓰는 것이요. 인스턴트식품이나 탄산음료, 단것 같은 거 아예 먹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되도록 친환경적이고 영양을 중시하는 태도를 볼 때마다 감탄해요. 저야 궁핍한 세대답게 그저 맛있는 것이라면 뭐든 먹였거든요. 일 년 열두 달 아이들이 원하면 언제나 라면을 먹게 했죠."
당시엔 뭐든지 듬뿍듬뿍 먹이면 잘 먹인 것 같아 혼자 흐뭇해하고는 했는데, 아들들 모두 서른이 넘자마자 서로 질세라 배가 나오고 지방간 경고를 받은 아이까지 생겼다. 그것은 전적으로 엄마인 박혜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공부하라고 못 놀게 하지는 않겠지만 더 신나게 놀게 하면서 먹을거리에 신경을 쓰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이번 주말에도 할머니 박혜란의 집은 찾아온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로 북적일 것이다. 그리고 미처 즐기지 못한 엄마 노릇을 어여쁜 손주들과 시간을 보내며 할머니 노릇으로 대신 만끽할 것이다. 즐기기에도 모자란 것이 아이들과의 시간이니까. 할머니 박혜란이 엄마들에게 말한다. 어서 즐기라고! 육아는 생각보다 잠깐이니 말이다.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강은진(객원기자) ■사진 / 김영길 ■참고 서적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박혜란 저, 나무를 심는 사람들)>
http://media.daum.net/zine/ladykh/newsview?newsid=20130613184217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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