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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보는 오후>/우리나라 드라마소식

진지한 문제의식 '확 깨는' 완성도

누군가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채로, 그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정의에 비추어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누군가가 내게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나를 사랑한다고 주장한다면? 모르긴 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당하면 그의 정신 건강이 온전치 못하다고 여길 것이다. 나아가 가능하면 그런 황당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황당하다 못해 해괴한 일은 우리 일상 속에 너무나 흔하게 널려 있다. 이 시대 부모들의 끔찍한 '자식 사랑'이 과연 말 그대로의 사랑이기는 한 것일까. SBS 특집 드라마 < 사건번호 113 > 이 던지는 화두다.

고등학생 딸이 갑자기 유학을 보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엄마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더는 어린아이가 아닌 딸을 존중해서가 아니다. 유학에서 돌아온 딸에게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는데 왜 겉돌기만 하느냐" 하며 몰아세울 때, 존중이 아니라 실은 방치였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엄마는 애당초 딸이 왜 유학을 요구하는지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녀의 '인격적 독립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매사 시시콜콜 캐묻고 감시하려 드는 부모가 더 나을 것도 없지만, 야비한 학교 폭력에 노출되고 급기야 함께 피해를 당한 친구의 자살까지 겪어낸 고통을 전혀 몰랐다는 건 '부모'이기 이전에 '어른'으로서 무책임했음을 방증한다. 딸에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요구를 들어주는 너그럽고 능력 있는 엄마도 좋겠지만, 실은 그보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주는 사려 깊은 엄마가 더 필요했을 것이다.





ⓒSBS 제공 < 사건번호 113 > (위)에는 딸을 보호해야 한다는 맹목에 사로잡힌 엄마가 등장한다.

드라마 속의 '사건'은 딸의 집에 들른 엄마가 침실 한복판에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시체를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이 충격적인 장면에서 엄마가 '딸의 소행'을 직감했으리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아닐 수도 있다'고까지는 못해도 '차마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도 틀림없이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딸을 보호해야 한다는 맹목에 사로잡힌 엄마는 애당초 사건의 진상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반복하자면 딸에게는, 예견되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필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엄연한 현실을 '꿈'이라고 우겨대며 아무것도 묻지 않는 헌신적인 엄마도 물론 필요했겠지만, 실은 그 이전에 설령 자신이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고 옹호해주는 엄마가 더 필요했을 거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까지 자청해서 뒤집어쓸 만큼 딸에게 집착했던 엄마에게 딸을 이해하려는 의사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마음을 활짝 연 대화'라는 그 간단한 방법을! 그렇다면 어느 부모인들 '나는 이 드라마 속의 엄마와는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드라마 속 엄마와 다를까'

이와 같은 문제 제기는 시의적절하고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그것을 드라마로 형상화하는 완성도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치명적 결함을 드러내어 무척 아쉽다. 가령 어설픈 화해. 엄마는 자신의 노력으로 '딸의 입'을 통해서 딸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 그저 당사자들의 비협조를 무릅쓰고 수사관들이 밝혀낸 '사실'일 뿐이다.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대화의 방법을 몰랐던 엄마가 새삼스럽게 대화할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또는 치밀하게 설정되어 극적 긴장감을 높인 '살인을 둘러싼 수수께끼'의 정교함과 너무나 대비되는, 그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의 어처구니없는 허술함. 진상이 드러나는 무대가 굳이 법정이어야 했다면, 사법 절차에 관한 최소한의 상식은 유지되었어야 했다.

검사가 형을 '선고'한다고 표현한 것쯤은 사소한 실수일 수도 있고, 법률심인 상고심에서 사실관계를 다투는 모습도 극적 설정이려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검사가 기소하지 않은 범죄에 대해 선고가 내려질 수는 없는데, 버젓이 살인에 대한 선고가 내려지고 그에 불복해 검사가 상고를 한다는 건 검사가 '정신분열'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에나 비유할 수 있는 황당무계한 설정이다.

게다가 검사도 사람이니 자기 개인사의 상처를 사건 관계자들에게 심리적으로 투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런 내면을 피고인에게 '시위하듯' 털어놓는 장면은 시쳇말로 '확 깨는' 오버다. 그건 실은 검사가 아니라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었던 것이다. 드라마적인 설정으로 암시했어야 할 작가의 의도를 상황에도 맞지 않는 등장인물의 대사로 까발리는 건 민망할 만큼 '아마추어'스럽다.

변정수 (미디어 평론가)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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