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호러 장르에서 '귀신'은 불안을 표상한다. 알 수 없는 미래,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낯선 사람들, 익숙해질 틈을 주지 않고 쇄도해오는 새로운 환경 등이 귀신의 형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자신을 해코지한 악당에게 복수를 하는 '원혼'조차도, 실은 누구나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며 살 수밖에 없기에 피할 수 없는 '응보'에 대한 불안이 투사된 것이다. 그래서 여름밤을 오싹한 한기로 식히기에 모자람이 없는 온갖 흉측한 몰골의 귀신이 무시로 출몰하는 SBS 수목 드라마 < 주군의 태양 > 은 납량물이긴 해도 '호러(공포물)'는 아니다.
이 드라마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귀신의 정체가 아니라 '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다. 가령 셈할 수 있고 거래할 수 있는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과, 계량할 수도 없고 거래할 수도 없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 사이의 갈등 구도는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낡아빠진 이분법이다. 압축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 극심한 아노미를 겪어온 한국 사회에서 이것만큼 대중적인 흡인력을 가지고 끈질기게 변주되는 주제도 드물다. 물론 이때 드라마의 현실성(리얼리티)과 역동성은 이 이분법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넘어서느냐에 달려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 드라마는 이런 이분법을 아예 기정사실로 공고하게 전제한다. 대신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매우 참신한 방식으로 살짝 비틀어놓았다는 데 결정적 묘미가 있다.
ⓒSBS < 주군의 태양 > 화면 캡처 < 주군의 태양 > 에서 산 사람에게 마음을 남기려는 귀신들은 태양(공효진·왼쪽에서 두 번째)을 끊임없이 호출한다. |
내면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광인'
그야말로 '소름 돋는' 리얼리티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내면의 소리를 (심지어 듣기 싫어서 한사코 피하려 해도) 들을 수밖에 없는 귀가 열린 사람은, 이미 물질적인 가치만이 '산 사람들'의 유일한(!) 현실로 자리 잡은 세상에서 태양처럼 '기인(이상한 사람)'이거나 '광인(미친 사람)'이며, 기껏해야 딱하고 불쌍한 사람일 따름이지 않은가. 그러니 정작 귀신보다 더 무서운 건, "똑똑하고 잘나게, 안 보이는 건 무시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이승의 사람들이다.
게다가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태양이 주군을 잡거나 만지면 귀신이 사라진다는 설정이다. 태양은 귀신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주군에게 매달린다. '양심'에 눈감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안락'의 유혹이라는 뜻일까. 그런데 태양이 주군에게 기대 귀신에게서 놓여난다면 이승과 저승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던 다리도 끊겨버린다. 그것이 과연 이 드라마가 그려내려는 해피엔드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태양마저 귀신을 모조리 저승으로 내몰아버린, '산 사람들'만의 이승은 지옥일 테니까. 이 드라마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로맨스가 용기를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실력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라는 주군의 대사를 뒤집어 음미할 필요가 있다. 로맨스가 실력을 가져다주지 않을지는 몰라도, 용기를 가져다주기는 한다. 주군이 태양에게 감염이라도 된 듯 이끌려 '아무 힘도 없는 마음'이 이승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수단으로 자신이 가진 현실적인 '힘'을 사용한다는 식의 전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정석이다. 그렇다면 태양 또한 여전히 무섭고 끔찍하고 귀찮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더는 귀신을 피하지 않고 의연히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주군의 적절한 협조를 얻는다면 태양은 더 이상 '이상한 사람'도 '미친 사람'도 아닌 '남다른 능력을 지닌'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승과 저승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는, 현실적인 실력과 내면의 용기는 화해할 것이고, 그것이 (현실에는 없기 때문에 드라마를 통해 꿈꾸는) '로맨스'다운 해피엔드일 것이다.
변정수 (미디어 평론가) / webmaster@sisain.co.kr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3082807581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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