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정은균 기자]
한글날이 다가온다. 올해는 훈민정음이 이 세상에 나온 지 567해째다. 한글날이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된 지 수년 만에 다시 법정공휴일로 재지정된 첫 해이기도 하다. 우리말을 사랑하고, 우리 문자인 한글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남다른 해로 다가올 것임에 틀림없다. 새삼 우리의 말글살이, 나아가 언어 민주주의의 문제를 찬찬히 생각해 본다.
대한민국은 '영어어천가' 세상이다. 온통 '로마자 공화국'이다. 공공기관이나 사기업체를 가리지 않는다. '영어어천가'나 '로마자 공화국'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세계화'를 들먹이며 '영어어천가'를 불러대고, '로마자 공화국'을 주도하는 이들에게 묻는다. 영어(로마자)를 아는 것이 세계화에 진정 도움이 되는가. 그 세계화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영어에 집착하고 로마자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물으면 세상이 영어 천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영어를 알아야 한다고, 로마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세계화'한 세상이니 영어나 로마자로 무장한 '세계인'으로 사는 건 당연하지 않느냐며 오히려 반문한다. 과연 그럴까.
영어와 로마자로 '세계화'한 '세계인' 99%가 각국의 1% 부자를 위해 불철주야 세계를 누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국제 경쟁력이니 지구촌이니를 들먹이며 '영어어천가'를 불러대는 이들이 우스운 까닭이다. 어려운 '로마자 공화국'의 시민을 자처하며 쉬운 자국 문자를 애써 외면하는 언어 반편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유다. 왜 그런가.
영어 선생 중에 영어를 하는 나라에 가는 이가 얼마나 될까.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 외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영어 선생이 '콩글리시' 발음을 하는 건 자연스럽다. 나는 '콩글리시'가 부끄럽다고 얕잡아보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정녕 '콩글리시'가 문제인가. '콩글리시'를 들먹이며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비하할 때, '순혈의 잉글리시'를 쓰는 '그분'들이 과연 우리를 가상하게 여겨줄까.
사기업체가 애지중지하는 '토익'이니 '토플'이니 하는 영어 시험은 또 어떤가. 해마다 수백만 명이 넘는 이들이 3만 원대에 이르는 응시료를 내고 토익 시험을 치른다. 삼성이 정기 어학능력 평가에 도입하면서 급성장한 '오픽'이라는 시험도 있다. 수험생이 공인 평가자와 직접 인터뷰를 하거나 전화 인터뷰를 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이 시험은 응시료가 8만 원에 육박하는데도 2010년에만 응시생이 13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높다.
국립 서울대학교의 '텝스'도 있다. 2009년, 텝스 응시원서 접수 대행사 대표가 11월 응시료 전액과 12월 응시료 일부 금액에 해당하는 24억 원의 돈을 빼돌려 필리핀으로 도주한 사건이 있었다. 한 달 평균 10억 정도의 응시료 수입을 예상해 볼 수 있는 금액이다. 그렇다면 한 해 응시료 수익이 100억 원 정도일 테니 그 순익 규모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영어 산업을 지탱해주는 '영어 소비자'의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2011년 4월 1일, <연합뉴스>는 "한국 성인 영어 실력 아시아 3위"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아시아에서 3위라니 괜찮을 성적처럼 보인다. 그럴까. 기사가 인용하는 원천 자료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이에프(EF) 에듀케이션 퍼스가 비영어권 44개국 성인들의 영어 실력을 국가별로 평가한 '영어능력 평가지수(EF English Proficiency Index)를 보면, 2007~2009년 사이의 전 세계 직장인 230만 명을 대상으로 문법과 어휘, 읽기와 듣기 등 4개 항목에 걸쳐 온라인 영어 시험을 측정한 결과, 우리나라는 비영어권 44개 국 중 13위를 차지했다. 중상위권 성적이다.
수백만 명이 막대한 시간과 비용 등 들인 공을 생각하면 초라한 결과다. 거대한 영어 산업을 지탱해주는 영어 소비자들이 만족할 만한 성적인지 의문이 든다. 평가 항목에 한국인이 취약한 말하기까지 포함됐다면 좀 더 심각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실상 국제 무역 비중이 어지간한 회사가 아니라면 토익이나 토플, 텝스 등이 보증하는 '서류상'의 영어 실력을 현장에서 써 먹을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다. 대기업체 중에는 임원 승진 시험에 영어를 필수로 요구하는 곳도 있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회사 최고 경영진은, 과연 그렇게 해서 승진한 임원의 영어 실력만 믿고 그 혼자만의 힘으로 중요한 사업 회의나 계약 등을 이끌도록 할 수 있겠는가.
언어 교육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온 국민을 시험으로 강제하고,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불이익을 주는 지금 방식으로는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다른 언어도 그렇지만 영어도 꼭 필요하고 정확히 알아야 할 사람들 중심으로 가르치면 된다. 보통 사람들은 기본 교양 수준의 회화나 문법 정도를 익히면 된다.
그런 점에서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의 영어 강의는 정말 어불성설이다. 내로라하는 국내 대학들의 영어 강의 비중은 꽤 높다. 90%가 넘는 카이스트를 필두로 포스텍과 고려대 등이 영어 강의 상위권을 차지한다. 대학 평가에서 영어 강의가 포함된 '국제화' 평가 항목은 전체 평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중앙일보> 등의 대학 평가 때문에 울겨 겨자먹기 식으로 진행되는 곳도 많으리라 짐작되는 이유다.
그나저나 영어로 강의를 하면 과연 영어 실력이 좋아질까. 영어로 하면 모어인 한국어로 할 때보다 세계적인 논문을 써낼 수 있는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이 길러질 수 있을까. 우둔한 나로서는 영어 강의 실력이 좋은 논문을 써낼 수 있는 토대나 비판적인 지성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국문학 교수가 <춘향전>을 영어로 가르치면 대학생들이 '춘향'과 '몽룡'을 더 사랑하게 될까. 한 카이스트 교수가 전 과목 영어 강의를 '체계적인 고문'에 비유한 심정을, '영어어천가'를 불러대는 이들은 얼마나 이해할까. '영어어천가'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와와는 거리가 멀다. '내수용'의 영어 공부, 이제는 정말 그만두어야 한다.
문자 사대주의, 곧 '로마자 공화국' 문제도 심각하다. 우리 국어를 연구하고 보급하는 국립기관인 '국립국어원' 누리집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로마자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누리집 하단의 기관명도 한글이 큰 글자로 앞서고 로마자가 조그마한 글자로 뒤를 따른다. 줏대 있고 올바른 순서다.
하지만 다른 곳은 어떤가. 공공기관이나 유명 기업들의 로마자 사랑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아니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차라리 광기 어린 집착이다. 괜한 생트집이라고 폄하하지만 말고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이 기사가 실릴지도 모르는 <오마이뉴스>는 왜 대문짝 높은 곳에 '오마이뉴스'라는 쉬운 한글 표기 대신에, 영어 문외한은 알기도 힘든 로마자 표기인 'OhmyNews'를 쓸까. 왜 '다음'이나 '네이버'는 '다음'이나 '네이버'가 아니라 'DAUM'이나 'NAVER'로 자신들의 맨 첫 얼굴을 치장해 놓았을까. '세계와 소통하는 망(Internet)'을 고려한 조치일까. 아무리 그래도, 가령 '오마이뉴스 OhmyNews'처럼 한글과 로마자를 병행해 주는 최소한의 줏대 정도는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문자 민족주의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 지구에는 문자 없이 말만 있는 언어가 수천 개나 있다. 애초에 한글(훈민정음)이 생겨나지 않았더라도 우리말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한글이 없어지더라도 우리말이 사라질 일은 거의 생기지 않는다. 1억 가까운 우리 민족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말이다.
하지만 문자 민주주의에는 특별히 유념해야 한다. 원광대 최경봉 교수는 저서 <한글 민주주의>에서 민족어의 사용 영역이 확대되는 현상이 민주주의의 발전과 비례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봉건 왕조 시대에 한자·한문을 고집한 양반 사대부들을 떠올려 보자. 영어와 로마자를 즐겨 쓰는, 현대의 소위 전문가·학자들은 또 어떤가. 그들의 세계를 진정 민주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해 보면 어떨까. 영어와 로마자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한국 사람이 두루 알고 쉽게 부려 쓸 수 있는 우리말, 우리글 대신에 배운 사람, 잘난 사람끼리만 통하는 영어와 로마자가 민주주의를 키우는 데는 분명 방해가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민주주의의 '적'을 품지 못해 안달 난 사람을 우리의 언어공동체를 파괴하려는 '내란 주동자'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한글에는 어린 아이나 못 배운 사람도 하루 아침에 익힐 수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아침 글자'라는 별명이 있다. 그 '아침 글자' 한글이 태어난 날이 이틀 후다. 언필칭, 다가오는 한글날에는 한글을 떠올리면서 우리의 언어 생활과 언어 민주주의 문제를 차분히 되돌아보자. 갈수록 '영어어천가'가 판을 치고, '로마자 공화국'을 향해 질주하는 대한민국을 그냥 이대로 놓고 보기에는 '봉건' 시대의 세종 임금을 볼 낯이 없어서 하는 말이다.
http://media.daum.net/issue/397/newsview?issueId=397&newsid=20131007104908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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