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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보는 오후>/살아가는 이야기

먼저 간 친구들아 우리 보고 있지?

"대한민국의 평범한 18세 소년·소녀들. 평범한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로 바라봐주세요. 그리고 '세월호 사고'를 잊지 말아주세요." 7월15일 오후 차를 타고 안산으로 향하며 이 문장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단원고 2학년 생존 학생들이 안산 단원고에서 여의도 국회까지 도보 행진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서다.

6월25일 사고 71일 만에 첫 등교를 하면서 공개한 '우리는 단원고 2학년 학생입니다'라는 글에서 이들은 자신들을 불쌍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두렵다고 했다. 기자들이 주변에 없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페이스북(facebook.com/sisain)으로 속보를 전해야 하는지 선뜻 결정하지 못한 건 그래서였다.

단원고 근처에 도착하자 오후 5시쯤 막 출발한 학생들이 보였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방송 차량과 카메라, 기자들이 보였다. 학교에 돌아오기 전 "사람들이 내가 단원고 학생이라는 걸 알아볼까 봐 자꾸 숨게 돼요"라던 학생들은 상의는 교복, 하의는 트레이닝용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시사IN 조남진 상의는 교복, 하의는 트레이닝용 반바지를 입은 학생들이 노란 손수건을 머리에 묶거나 목에 두른 채 단원고에서 국회까지 1박2일 동안 걸었다.

'손과 가방에 노란 깃발' '교복 칼라에 노란 리본'… 보이는 대로 적어 휴대전화로 팀장에게 전송했다. '기록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나비가 그려진 노란 손수건을 머리에 묶고 목에 두른 학생들에게선 어떤 결기가 느껴졌다. '이 이, 보고 싶다 지켜봐줘 진상 규명!' '잊지 말아주세요 0416' '♡사랑해♡' 깃발에 적은 메시지만으로도 하고 싶은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출발할 때 학생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은 법을 모릅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 친구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희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학생들은 가슴에, 가방에 희생된 친구들의 명찰을 달고 있었다. 손목에는 '리멤버(REMEMBER) 0416'이라고 적힌 노란 팔찌를 찼다.

학생들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단원고 2학년 생존 학생 38명(둘째 날은 42명)과 교사 7명(둘째 날은 10명), 학부모 10명(둘째 날은 18명)이 7월15일과 16일 이틀 동안 47㎞를 걸었다. 동행하는 내내 학생들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힐끔힐끔 보고 대화를 엿듣는 것조차 미안했다.


ⓒ시사IN 조남진 학생들은 가방이나 가슴에 희생된 친구들의 명찰을 달았다.


ⓒ시사IN 조남진 두툼한 깁스를 한 채 행진에 나선 학생도 있었다.

다만 두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먼저 학생들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손에 든 깃발이나 부채로 서로 머리를 건드리는 등 장난을 쳤다. 자신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했고, 여느 고등학생들처럼 재잘재잘 웃고 떠들며 갔다. 더운 듯 골목 전봇대에 축 늘어져 있는 고양이를 귀여워하며 영상에 담기도 했다. 7월15일 오후 6시50분 친구 102명이 잠들어 있는 하늘공원에 들렀을 때와 다음 날 오후 3시20분 국회에 도착한 순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묵언 순례'라기에는 밝고 씩씩했다. 응원 나온 시민들에게 고개 숙이며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 하나는 가는 내내 지치지 않게 서로 도왔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자주 손을 꼭 잡고 걸어갔다. 친구 등을 어루만지고, 앞 사람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서로의 허리에 파스 스프레이를 뿌리고, 팔에 물을 부어주기도 했다. 잠시 쉬는 동안은 친구의 다리를 풀어주었다. 찻길을 지날 때면 "벽으로 붙어"라며 안전을 챙겼다. 무엇보다 서로 업어주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몇 걸음 가진 못했지만). 한 남학생은 오른쪽 발목 복사뼈를 심하게 다친 상태에서 두툼한 깁스를 하고 도보 행진에 나섰다. 중간중간 의료진에게 등 떠밀려 앰뷸런스에 올라 치료를 받긴 했지만 끝까지 걸었다. 한 남학생은 깁스한 친구에게 "내가 업어준다고 했지? 약속"이라고 말했다.

이틀간의 도보 행진에 앰뷸런스를 타고 함께한 한사랑병원 이정훈 원무부장(41)은 "발목을 다친 학생도 있었고 무릎이 좋지 않은 학생도 몇 명 있었는데, 걷지 말라고 얘기해도 끝까지 절뚝이며 걸었다. 아이들이 의지가 강해서 앰뷸런스 타고 가는 것 자체를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 서로 지치지 않도록 보듬으며 안전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의지가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는지, 학생들이 가는 길마다 함께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첫날인 7월15일 오후에는 어리둥절해서 바라보기만 하던 시민이 더 많았다. 인파가 드문 길을 걸었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부터 어디선가 나타난 이들이 손팻말과 음료수, 아이스크림 등을 준비해와서 하나둘 응원에 나섰다. 이들은 학생들이 나타나자 박수치며 "고마워" "파이팅"이라고 외쳤다. 태블릿 PC에 '힘내'라는 메시지를 띄워 들고 선 시민도 있었다. 밤 10시40분 에쓰오일 박달주유소에 중학교 2학년 아들과 초등학교 6학년 딸을 데리고 나온 황정희씨(40)는 "낮에 회사에서 일하다가 애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운 내라고 아이들과 나왔어요. 어른들이 못나서 애들까지 나서게 하고…"라고 말하다 눈물을 훔쳤다. 황씨가 들고 나온 손팻말에는 '더 많이 웃고 행복해야 이기는 거'라고 쓰여 있었다. 한밤중에 엄마 아빠, 동생을 이끌고 나온 중학교 3학년 김영록군은 "형·누나들이 자랑스럽다 생각해요. 세월호 사고, 어른들이 일찍일찍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어른들답지 않게 무식하게 한 게 많이 안타까워요"라고 말했다.

예정보다 40분 정도 늦어진 7월16일 새벽 1시30분 숙소인 광명시 청소년수련관(서울시립근로청소년복지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시민이 길게는 세 시간 넘게 학생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학생들을 보자 박수를 치며 "고마워" "사랑해"를 외쳤다.

8시간30분에 달하는 도보 행진에 비교적 푹신한 운동화를 신은 기자 발바닥에도 불이 났다. 엄지발톱이 발가락을 자꾸 눌러서 나중에는 감각이 없었다. 샌들을 신고 함께 걸은 조은희 인턴 기자의 새끼발가락은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광명시에 거주하는 한 시민이 이튿날 조은희 인턴 기자를 위해 운동화를 준비해주시기도 했다). 기자의 경우 발과 다리보다도 골반이 문제였다. 밤부터 왼쪽 골반을 움직이기 어려워 대열에서 자꾸만 처졌다. 팔과 손등은 모기에게 크게 물렸다. 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공기가 덥고 습했다. 근처 모텔에 방을 잡고 티셔츠를 보니 땀이 마르고 남은 소금 자국이 선명했다. 목이 새까맣게 탔다. 쓰러지듯 잠들었다.


ⓒ시사IN 조남진 도보 행진 이틀째인 7월16일 서울 영등포의 한 어린이집 아이들이 학생들에게 하이파이브 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손팻말·현수막을 들고 학생들을 응원하는 시민들의 행렬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니 어깨와 다리 등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학생들이 다시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다행히 일정이 늦춰졌다. 숙소 앞에는 이미 많은 시민이 응원을 나와 있었다. 아이들과 어른들은 입을 모아 노래를 불렀다. "혼자라고 느껴질 때면 주위를 둘러보세요. 이렇게 많은 이들 모두가 나의 친구랍니다…." 그 응원을 받아 "파이팅"을 외치며 학생들이 오전 10시50분 출발했다. 전날과 달리 가방은 대부분 내려놓았다. 한눈에 봐도 다리를 절뚝이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 무릎과 발목에는 파스가 붙어 있었다. 기온 31℃에 습도 70%인 날씨를 고려한 듯 모자를 쓴 학생들도 보였다.

아스팔트의 열기와 습기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땀이 주르륵 흘러내려 속눈썹으로 자꾸 들어왔다. 그런데도 응원을 나와 함께 걷는 시민들은 200여 명으로 늘었다. 17개월 아이를 안고 생수를 얼려서 나온 엄마, 배 모양의 조형물을 머리에 이고 함께 걷는 디자이너, 점심시간을 이용해 나온 중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유치원생부터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 조합원들까지 학생들에게 힘을 보탰다. 길목마다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를 든 시민들이 함께했다. 300명, 400명으로 동행자는 계속 늘어 여의도에 도착할 무렵에는 500명을 훌쩍 넘었다.

세월호 특별법 통과를 요구하며 단식 중인 부모들(국회 10명, 광화문광장 5명)도 아이들이 온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2학년9반의 한 어머니는 전날 저녁에 직접 응원을 오기도 했고, 유경근 가족대책위 대변인은 페이스북에 "우정과 미안함에 나선 우리 아이들의 길… 고약한 어른들의 시선 말고, 우정이 가장 중요했던 17살의 마음으로 바라봐주시길"이라고 썼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단식 중인 2학년7반 고 이민우군 아버지 이종철씨는 "아이들이 얼마나 답답하면 걸어오겠어. 사실 그 아이들이 미안할 필요는 없는데, 버스 타고 와도 되는 길을 걸어오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후 2시50분 여의도공원에 들어서자 학생들이 "여의도 입성"이라며 박수를 쳤다. 시민들이 눈가가 촉촉해진 채 '너희들이 희망이다'라는 피켓을 들고 박수를 보냈다. "잘했다" "멋있어" 잠시 숨을 돌리며 응원으로 받은 빵·샌드위치·오이·음료수 등 각종 간식을 동행하는 시민들과 나눴다.

"원하는 건 진상규명이다. 특례 따위!"

리본이 그려진 노란 우산을 펴들고 오후 3시10분 여의도공원을 출발한 학생들이 10분 뒤 국회에서 부모들과 만났다. 학생들은 이제는 곁에 없는 친구의 부모들에게 "사랑합니다"라고 외쳤다. 이들은 각자 들고 온 노란 깃발을 국회 울타리에 꽂고, 부모들에게 직접 쓴 편지 37통을 전달한 뒤 버스 두 대에 올랐다. 부모들은 "고마워, 고마워"라며 눈물을 보였고, 절뚝이며 버스에 오른 학생들도 연방 눈물을 훔쳤다.

ⓒ시사IN 조남진 국회로 향하며 학생들이 펼쳐 든 노란 우산에는 '리멤버 0416'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들은 희생된 친구의 부모들에게 직접 쓴 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이후 공개된 편지에서 학생들은 희생된 친구의 부모를 '엄마 아빠'라고 불렀다. "저는 친구들 마지막까지 다 보고도 그냥 헬기 타고 나왔어요. 아직도 애들이 없다는 게 안 믿겨요. 보고 싶어요. 애들 봤는데도 그냥 배에서 나왔을 때, 아직 못 나왔다고 할 때, 전 애들한테 엄청 미안했어요. 지금은 애들을 위해 열심히 행동할 거예요. 같이 힘내요! 사랑해요!" 국회를 향한 쓴소리도 적혀 있었다. "국회야, 우리가 원하는 건 진상규명이다. 특례 따위!"

물집이 잡히고 다리를 절뚝이며 학생들이 걸은 47㎞는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된 '치유'의 과정이 되었다. 장동원 생존학생 가족 대표는 "참사 이후 저렇게 아이들이 편하게 웃는 것을 처음 봤다. 친구를 위해 뭔가 했다는 뿌듯함이 있는 것 같다. 딸도 '아빠, 나는 친구를 위해서 그래도 했어'라고 말했다"라고 전했다.

취재 도움:김원진, 조은희, 함규원 인턴 기자

전혜원, 김은지 기자 / webmaster@sisain.co.kr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40725091914837

 

우리의 몸이 아직 뜨거운 건 우리가 아직 성장하고 있기때문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성장한다. 죽기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