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이다. 쉬는 시간에 교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장 아무개 선생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희 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십니다. 오셔서 선생님들을 만나주셨으면 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는 동료 교사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났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고 싶다고 했더니 다음 날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학업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담배를 피우거나 공허하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 수업 시간에 자고, 말하고, 움직이고, 수업을 진행하기가 어려워서 선생님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하소연한다. 이렇게 배움의 공동체가 깨지다 보니 교사가 학생을 보는 눈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학교에는 실업계를 가려다 떨어진 학생들이 상당수 있다. 자신은 실업계 고교에 가고 싶어했으나 부모님 뜻에 따라 인문계로 진학한 학생도 있다. 그들의 생활지도 문제로 교사들이 마음을 상하기도 한다.'
ⓒ박해성 그림
요즘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기가 조금씩 쉬워지고 있다. 실업계(전문계 특성화고)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고나 할까? 과거 같으면 인문계고로 진학할 만한 성적을 가진 학생들이 상당수 우리 학교를 지망하게 되면서 면학 분위기가 한결 좋아진 까닭도 있다. 한창 수업을 하다가 "이거 우리 학교 맞아?"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와 동료 교사들이 행복해진 만큼 장 선생과 그의 동료 교사들은 불행을 겪고 있는 셈이다.
'나쁜' 학생이야말로 학교의 도움이 필요한 학생
이런 현상은 인문계를 나와서 대학에 들어가도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고졸자를 우대하는 사업체에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식의 정부 정책도 한몫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학교가 학생 개개인의 성장과 행복보다는 입시 명문고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상위 몇 퍼센트의 '좋은' 학생들에게만 관심을 쏟는 것이 문제다. 그러다 보니 정작 학교의 도움을 받아야 할 '나쁜' 학생들은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다. 아니면 교사들을 힘들게 하는 애물이 되거나.
올해 우리 학교에도 '좋은' 학생들이 많이 입학했다. 물론 여기서 좋은 학생이란 성적이 좋은 학생을 의미한다. 학교는 성적순으로 학생의 입학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종종 "올해 우리 학교에 좋은 학생들이 많이 들어왔어요"라는 식으로 말실수를 하곤 한다. 뒤가 찜찜하여 얼른 '좋은'을 '성적이 좋은'으로 고쳐서 다시 말할 때도 있지만 그냥 내버려둘 때가 더 많다. 사회 통념상 둘 사이의 변별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속으로나마 '좋은'을 '성적이 좋은'으로 수정하고 싶어진다. 그 이유는 좋은 학생이 있으면 나쁜 학생도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올해 좋은 학생이 들어왔다'는 말 속에는 '지난해에 나쁜 학생들이 들어왔다'는 말이 되는 셈이 아닌가. 그것도 성적이 나쁜 학생이 아닌 그냥 나쁜 학생이.
때로는 이런 생각이 조금 더 발전하여 물음을 던진 나 자신조차도 황당해질 만한 지경까지 가버릴 때가 있다. 가령, 이런 물음은 어떤가? '품행이 나쁜 학생은 나쁜 학생인가?' 성적이 나쁜 것이 성적이 나쁜 것일 뿐이라면, 품행이 나쁜 것도 품행이 나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하긴 성적이 나쁜 것이 존재가 나쁜 것이 아니듯 품행이 나쁜 것도 존재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장 선생과 그의 동료 선생님들을 만나면 이런 뜬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를 먼저 해볼 생각이다. 과연 통할까? 나는 내심 자신이 있다. 학교에는 좋은 학생도 나쁜 학생도 없다는 것! 성적이나 품행이 나쁜 학생은 있어도 존재 자체가 나쁜 학생은 없다는 것! 이런 생각이 어느 날 운명처럼 나를 찾아오면서 학생들과의 소통이 조금씩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늘 마음에서 들끓던 '나쁜' 학생들에 대한 실망을 넘어선 분노와 슬픔과 절망이 차츰 사라진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이제 교사로서 그들을 도와줄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아니 행복하랴? 내가 행복하다는데 누가 토를 달 것인가.
안준철 (순천 효산고 교사·교육공동체 벗 이사) / webmaster@sisain.co.kr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4072509071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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