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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시간

[스크랩] Re:(자료)다시 생각해보는 이원수

용산지회 우문희입니다.

지난 5월에 이원수의 오월의 노래를 발제하면서 조사했던 이원수에 대한 내용입니다.

 


노컷뉴스 08.4.29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아동문학가 이원수 등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4800여 명의 2차 명단이 공개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차 명단에 이어 이번 발표에서도 친일파로 분류됐다.

올 8월 출간 예정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친일파들의 명단이 공개됐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추진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는 오늘(29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친일인명사전에 실릴 친일파 4776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이번 명단발표는 지난 2005년 1차 발표에 이은 두 번째로, 여기에는 애국가의 작곡가인 음악가 안익태, 동요 고향의 봄 작사가인 아동문학가 이원수, 무용가 최승희 등이 새롭게 포함됐다.

구체적으로 안익태 씨는 1938년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음악을 작곡했으며 1942년에는 만주국 창설 10주년 기념음악회에 만주환상곡을 작곡해 지휘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 씨는 1942년과 43년 잇따라 '지원병을 보내며' 등의 친일 작품을 잡지에 게재했으며, 최승희 씨는 일본 무용의 세계화란 명목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국방헌금을 7만원 이상 헌납했다.

편찬위는 이번 명단이 철저한 증거주의에 근거해 객관적으로 작성됐다고 강조했다. 편찬위는 이날부터 60일 동안 명단 선정에 따른 이의신청을 받은 뒤 올 8월 친일인명사전 인물편 3권을 발간할 예정이다.

한편 이번 명단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전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연세대 초대 총장 백낙준 등이 1차 발표에 이어 그대로 포함돼 이를 둘러싼 논란도 계속될 전망이다.


지원병을 보내며 - 이원수 작(반도의 빛, 1942. 8월)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 소리높이 군가가 울렸습니다

정거장, 밀리는 사람 틈에서 / 손 붙여 경례하며 차에 오르는 / 씩씩한 그 얼굴, 웃는 그 얼굴

움직이는 기차에 기를 흔들어 / 허리 굽은 할머니도 기를 흔들어 / ‘반자이’ 소리는 하늘에 찼네

나라를 위하여 목숨 내놓고 / 전장으로 가시려는 형님들이여 / 부디부디 큰 공을 세워주시오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 / 굳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다.


http://www.leewonsu.co.kr/main/ 이원수 문학관



이원수 선생의 일제 말기 친일 시, 어떻게 볼 것인가 - 이오덕(한국글쓰기연구회 회보 [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2002년 11월호)


선생의 친일 시는 우리 민족 앞에서 크나큰 죄를 지은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깝고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 더 실망하지는 않는다. 이원수 선생이 쌓아 놓은 문학의 업적이, 선생의 그 전과로 하여 무너진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선생의 문학을, 우리 겨레 어린이문학을 떠받치는 가장 든든한 기둥으로 되어 있다고 보고, 또한 선생의 사람됨을, 이 세상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맑고 바르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분으로 언제나 가까이 하여 왔던 지난 모든 날들을 결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중략)


나는 일제시대부터 6·25 남북 전쟁 무렵까지 선생이 하여 온 일에 대해서는 작품과 책으로 알 뿐이다. 그런데 1953년부터는 편지로, 전화로, 만나서 주고받는 말로, 함께 한 여행이나 그 밖의 일로 선생을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대하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생만큼 불의와 부정을 싫어하고,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만난 적이 없다. 작품으로도 그렇다. 4·19 때 독재자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화로 쓰고 동시로 쓴 사람은 이원수 선생뿐이었다. 전태일 청년이 스스로 몸을 불태운 사건을 동화로 쓴 사람도 이원수 선생뿐이었다. 남북 분단의 비극과 통일을 애타게 바라는 우리 겨레의 슬프고 애끓는 바람을, 선생은 여러 동화작품에서 훌륭하게 그려 보였다. 이래서 선생의 문학은 우리 겨레 어린이문학의 가장 올바른 줄기를 잇고 그것을 튼튼하게 지탱해 주는 기둥으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이다.


선생은 이처럼 올곧게 살았고, 우리 어린이문학에서 그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의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는데도 세상살이에서는 언제나 푸대접을 받았다. 권력과 손잡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공만을 이념으로 하는 군사독재 폭력 정권에 붙어서 그 반민주 정치를 추종하고 찬양한 모든 문인들에게 따돌려져서 음으로 양으로 냉대를 받는 처지로도 되었으니, 이에 따라서 물질 생활면에서도 여간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가는 길과 아주 어긋난 사람의 손을 잡은 일이 없었다. 마지막에 죽음과 싸우는 끔찍한 병을 앓으면서도 광주 사건을 소식으로 듣고 분노했던 것이다. (중략 - 이원수 선생은 1981년 1월에 71세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보존하는 그 자리에는 선생의 빛나는 모든 작품뿐 아니라 일제 마지막에 썼다는 그 친일 동시까지도 있는 그대로 죄다 보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더 큰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선생도 저승에서, 생전에 스스로 깨끗이 보여 주지 못했던 것을 우리가 하여 준 일에 대해 다행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작품을 읽게 되는 우리 아이들까지도, 세상의 어른들이 하는 모든 일을 더 깊게 더 넓게 생각하게 되고, 더 참되게 깨닫고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을 완전무결한 성인군자처럼 살아간 위인에게서보다도 결함이 있었던 사람, 자기와 비슷한 점이 있었던 사람한테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듯이, 나도 한때 잘못했지만 그것을 뉘우치고 바르게 살면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구나 하고 자신감을 가지게도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원수 선생은 우리 겨레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정한 분으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가증스러운 기회주의자 이원수

                          - 동화작가 김하늘(모난돌 체험학교http://cafe.daum.net/monandolhakkyo)

  

이원수가 친일시를 쓴 것은 아마도 복직을 조건으로 한 것 같다. 먹고 살기 위해서 친일을 했다는 말이다. 복직만 할 수 있다면 친일을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원수는 일본이 천년만년 우리땅을 차지 할것이라고 믿었나 보다. 조선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러니 친일시를 썼겠지. 썩어빠진 작가정신이다

그리고 한국전쟁때는 인공치하 서울에서 부역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아무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이 땅에 살았다 시치미를 뚝떼고...

어떻게 보면 이원수는 참 불쌍한 사람이다. 영원할 줄 알고 충성한 일본도 40년을 가지 못했고 인공치하에 충성하려 했더니 석달여 만에 그 꿈도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안 속는다고 남한 정권에 협조하지 않는 줄에 섰지만 그 마저도 줄 잘못 선 거다.

출세 한 번 해보려니 참 힘들구나 했을 게다. 이원수가 경마나 주식을 했더라면 쫄딱 망했을 것 같다.

'난 일본이 좋아 그러니 이 시덥잖은 한국 정부는 싫어' '일제시대 때는 참 좋았는데'

친일 잔당들이 흔히 내뱉곤 하던 말들이다. 이원수도 독재정권에 협조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저항한 게 아니라 한국 정부를 인정하기 싫었겠지. 언젠가는 일본이 다시 이 땅을 집어 삼켜서 좋은 세상 올 거라고 생각했겠지.

이원수가 남긴 작품이 좋으므로 친일행각은 용서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참 어이없는 말이다. 양팔저울에 친일과 업적을 양쪽으로 올려 놓고 무거운 쪽으로 선택을 하자는 것인가?

그렇다면 전두환의 철권통치도 경제번영과 올림픽 유치라는 업적으로 덮어주어야 한다. 노태우 정권이 저지른 비리도 북방외교 업적으로 덮어야 한다. 관동군 장교이자 유신독재 대통령 박정희는 또 어떤가? 보리고개를 없앤 공으로 다 덮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역사앞에 심판 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원수가 친일을 사죄했는가? 국가와 민족앞에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밝혔는가? 그리고 참회 했는가?

가까이 지낸 후배들 한테 마저도 말하지 않은 사람이다.

제 출세와 편함을 위해서라면 민족을 배반하는 짓 정도는 손 바닥 뒤집듯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쓴 글은 손끝 재주일 뿐이다. 민족을 우롱하는 사기일 뿐이다.  

이원수 친일이 밝혀졌는데도 존경이 변함 없다거나 용서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혹시 이원수를 부정하면 이원수를 이어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올라간 지금 자리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속는 사람이다. 이원수는 우리 모두를 비웃고 있겠지. "짜식들 나한테 확실하게 당한 놈들." "내가 친일한 게 밝혀졌는데도 욕하지도 않고 떠받들어주는 귀여운 것들"

작가가 도둑질을 하건, 강도를 하건, 사람을 치건, 강간을 하건 그런 건 개인문제다. 그런건 경찰에 잡혀가서 법에 처벌받으면 된다.

하지만 작가가 무엇인가? 글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이다. 사람들을 속이고, 올바르지 못한 정신으로 세상을 바꾼다면 그게 어디 올바른 세상이 되겠는가?   

부디 이 바닥에서만은 정의가 바로 서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오덕선생님은 어린이문학에 친일파와 독재정권을 찬미한 사람 작품을 싣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글을 보니 이원수를 용서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내가 독서 장애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어린이문학에는 안 싣더라도 부정하지는 말자고 하는 뜻이 되는데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 머리로는 무슨말인지 참으로 알기가 어렵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원수《털어놓고 하는 말·2》뿌리깊은나무,1980.11. 5

   나는 소년 시절부터  동요와 동시를 써 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동화와 함께 동시를 쓰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눈에 뜨이지도 않는 일이고 또 문단에서도 따돌림을 받는 아동 문학을 하면서 한평생을 살아 온 것에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마음속에 내 생각이 스며드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순수한 어린 마음을 길이 살려서, 착한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이 밝고 깨끗한 곳이 되게 하는 데에 조그만 힘이라도 되려고 하는 나의 소망 때문이다.

  일천구백삼십년 삼월에 마산 공립 상업학교를 졸업한 나는 함안읍에 있는 금융조합, 곧 지금의 농업 협동 조합에 취직이 되어 함안으로 갔다. 그때에 상업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좋은 일자리를 얻은 셈이었다. 그 일자리는 내가 취직 시험을 봐서 얻은 것이 아니고, 학교에서 성적에 따라 추천해 줘서 얻은 것이었다.

  그곳에서 하숙을 하다가 한해 뒤에 어머니가 오셔서 함께 살았다. 하숙을 할 때는 줄곧 집 생각과 마산의 친구들 생각으로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마산과 함안은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틈만 있으면 마산으로 갔다.

  가슴속에는 문학에 대한 꿈을 안고 시를 생각하면서도 대부금과 예금 사무를 보는 시골 직장에 몸담고 있던 나는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 정책 밑에서 찌든 농민들의 생활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꽤 각박한 생활을 하는 농민들에게 대출금의 이자를 독촉해야 하는 나 자신의 꼴을 그저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별다른 힘이 없던 나로서는 기껏해야 이자를 좀 연기해 주는 것 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이자를 받으러 가면 농민들은 참 반가워했다. 농민들은 나를 금융조합의 직원이라기보다는 자기들이 가진 문제를 함께 의논해 주는 상담자로서 더 크게 생각해 주었다. 금융조합에서 빌려 주는 동의 액수는 담보물이 없을 때에는 이백원까지였다. 이자는 백원에 하루에 삼전 일리였으며 한해의 이자율은 일할 삼푼이었다.

  함안읍에서 바로 보이는 산으로 여항산이 있다. 봄 삼월, 결산기가 되면 나는 그 산을 넘어 저편 골짜기에 있는 동네에도 이자를 받으러 다녀야 했다. 그때에 함안의 금융 조합이 맡고 있던 지역은 함안면, 가야면, 산인면, 여항면의 네곳이었는데 그 중에서 여항면은 여항산에 둘러싸인 산골이었으며,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것말고도 숯을 구워 읍에 내다 팔기도 했다.

  여항면을 다닐 때는 거의 산을 타고 넘어야 했다. 차를 차고 가는 길은 산을 돌아 갔기 때문에 멀었고, 그보다도 나는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싫었다. 특히 여항면에 가느라고 땀을 흘리며 그 가파른 산고개 위에 올라서면, 먼 산줄기에서부터 솔바람이 불어왔다. 내가 고갯마루에 앉아 쉬고 있노라면 그 가파른 고개를 숯짐을 지고 때묻은 흰 바지저고리의 가난한 사람들이 넘어왔다. 읍내 장에까지 지고 가서 그 숯을 팔아 돈 몇 푼을 얻기 위해 하루를 다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산 너머 골짜기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히 먼 곳에 조개 껍데기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집들이 보이고, 멀리서 낮닭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나는 함안에서 일하게 된 지 세해쯤 지난 뒤에 <여항산에게>라는 시를 썼는데 이걸 일본말로 번역하여, 금융 조합 감독부인 도청 이재과에서 내는 기관지에 기고했더니 요행히 게재되어 원고료 십원을 받았다. 그때는 동시 한편을 써서 일이원쯤 고료를 받으면 다행으로 여기던 때라 월급 삼십원짜리 나로서는 큰돈이었다.

  농촌의 피폐한 모습과 흰옷 입은 산촌민의 모습을 그렸고 그들에 대한 내 뜨거운 마음을 노래한 시였는데 어떻게 일본 사람들이 그걸 실었는지 잘 모르겠다.

  금융 조합 생활 속에서 내가 할 일은 조합 사무실뿐만이 아니라, 문학 공부를 혼자 힘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문학 공부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문학 이론 서적을 많이 읽었다. 주로 일본 서적이었는데 그때 일본의 아동 문학가 몇 삶의 글과 소설도 많이 읽었다. 그때 "세계 문학 전집"이라는 일본말로 번역된 책을 꽤 감동깊게 읽었는데 그 뒤로는 다시 읽을 기회가 없었다. 남의 눈에 표나지 않게 하는 문학 공부였지만 날이 갈수록 남들이 나의 생활을 이단시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같은 금융 조합의 직원이면서 직업과는 어눌리지도 않는 문학 공부를 하는 것이 다른 직원들이 보기에는 내가 마치 별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농촌의 아이들과 어울려 노래하며 놀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농촌의 어린아이들의 생활은 나의 동시의 소재가 되었다. 그것은 자연히 슬픈 가락의 노래로 씌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추운 날도/언니는 지게 지고 나무 가셨다./호오호오 손 불면서/나무 가셨다.

솔밭 부는 바람은 위잉위잉…/골짜기 개울은 꽁꽁 얼어서/춥단 말도 안 나오는/저기 저 산.

해야./번쩍이는 해야./좀더 내려와서/나무 하는 우리 언니/쬐어나 주렴."(<나무 간 언니>)▣

  그 무렵에 나온 동요들 중에는 즐거운 가락을 담은 것이 많았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이들이 그런 즐거운 가락을 담은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참된 즐거움이 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적어도 농촌 아이들에게 그 동요들은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불우한 겨레, 그 중에서도 불우한 아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내 시의 소재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들에게 즐거운 가락의 놀이나 오락적인 내용의 노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시를 쓰는 것이 본디 고독한 일이겠지만 시골 농촌에서 회계 사무를 보며 살고 있던 나는 무척 외로웠다. 그러한 데서 좀더 활기있는 생활, 곧 문학의 불을 지피려는 생각에서 직장 동료 한 사람과 고향 마산의 친구들 몇 사람이 모여 문학 모임을 만들었다. 달마다 회합과 작품 회람, 합평회 등을 통해 농민 문학을 주로 공부하려는 모임이었다. 우리는 쓸데없이 꼬투리를 잡힐까봐 모임에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그때 우리 모임을 지도해 주면서 고문 노릇을 하던 사람은 민요 시인으로 알려진 양우정 씨였다.

  나는 이 모임으로 생기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조그마한 모임이지만, 자칫하면 빠져들기 잘하는 문학에의 회의 같은 것을 씻을 수도 있었고 용기도 돋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해 남짓 지났을 때, 그러니까 일천구백삼십오년에 그 모임의 회원들이 농민 문학을 연구한다고 불온 사상 단체로 몰려 제국주의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철창 신세를 져야  했다. 함안에서, 마산에서 그리고 일본 규슈에 가 있던 친구까지 모두 잡혀서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예심에 넘겨졌다.

  나는 어두컴컴한 유치장에서 두달 남짓 있다가 마산 형무소로 넘어갔고, 거기서 또 부산으로 옮겨가서 겨울을 나고 한해 남에 가까스로 집행 유예로 나왔다. 그 바람에 어머니가 무척 걱정하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때까지 한번도 만나 보지 못한 천리 밖의 한 여자가 몹시 마음을 졸인 사실은 함께 검거된 친구들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처구백십이십삼년에 소파 방정환 선생이 펴낸 <어린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내가 열여섯살이 되던 일천구백이십육년에 나는 이 잡지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을 써 보냈는데 이 동시가 실리게 되었다. 세상에 발표한 내 첫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 전해에 이 잡지에 수원에서 사는 최순애라는 여자가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되는 >오빠 생각>이라는 동시를 발표했었다.

  나는 그 동시가 무척 좋아 내가 같은 잡지에 글이 실렸다는 것을 핑계로 편지를 썼더니 답장이 왔다. 이때부터 나와 최순애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아부를 묻고, 문학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그쳤는데 일고여덟해를 계속해서 편지와 사진까지 주고받게 되자 우리는 점차로 혼인할 뜻을 굳히게 되었다. 이렇게 계속해서 편지로만 사귀어 오다가 일천구백삼십오년에 드디어 우리는 수원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사진으로 얼굴을 익히고는 있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던 나는 이러이러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수원역에 내리면 바로 난 줄 알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만나기로 약속한 그날에 나는 검거되어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지게 된 것이었다. 예심이 끝난 가을에야 겨우 편지를 낼 수 있었고, 그제서야 최순애의 편지를 받았다.

  "…잡혀가셨더라도 곧 나오시려니 했는데 봄이 되어도 아니 오시고 여름이 되어도 소식조차 알 길이 없었어요. 뒷동산과 집 주위에 코스모스도 다 지고, 지금은 찬바람에 눈이 옵니다."

  그래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는 걸 알고 참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일천구백삼십육년 일원 삼십일에 풀려나서 마산으로 돌아온 나는 완전히 실직자요 빈털터리였다. 그러나 한해 동안 나를 기다려 준 최순애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수원으로 갔다.  그때 들었지만 그와 만나기로 했다가 내가 잡힌 그날에 지금은 내 아내가 된 최순애 대신에 수원역에서 나를 기다리던 장인은 내가 끝내 오지 않자 화를 내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더욱이 내가 "사상범"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로 옥에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아내의 집안은 발칵 뒤집혀졌다고 했다.

  아무튼 내가 수원에 간 것은 환상 속의 세계가 현실 세계로 펼쳐지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아내의 집에서는 내 전과를 내세워 혼인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때 우리 편에 서서 도와 준 사람은 그의 오빠 최영주였다. 최영주는 방정환 선생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개벽>, <신여성> 같은 방정환 선생이 편집을 맡았던 잡지사에서도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가 편을 들어 주어 아내의 집에서 간신히 허락을 받아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일천구백삼십육년 유월에 우리는 장인이 아는 서울 견지동의 작은 교회에서 혼례를 치렀다. 우리집에서는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고 아내의 집 식구들만 참석한 초라한 혼례였다. 식을 올리자마자 수원으로 내려온 나와 아내는 신혼여행을 가는 셈치고 곧장 마산으로 갔다.

  나의 신혼 생활은 행복과 고통이 뒤범벅된 것이었다. 실직자로서의 불안한 나날을 신혼의 달콤한 즐거움으로 덮으며, 나는 마산시의 동쪽에 있는 산호동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그때의 산호동은 지금과는 달리 외딴 동네였고 집 뒤로는 바로 용마산이 있었다.

  사랑이 중하다 해도 직업도 재산도 없는 내게로 와서 사투리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나내는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내는 집 뒤 산머리에 올라가서 곧잘 작은 소리로 토셀리의 <소야곡>을 부르곤 했다. 그 노랫소리는 내 신세 탓인지 무척 슬프게 들렸다. 고향 마산에서 나는 한때 한약방의 회계로 일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생활은 어려웠다. 그런데 이듬해인 일천구백산십칠년에 나는 함안 금융조합에 다시 가게 되었다. 이른바 사상범으로 형을 받은 사람을 써 줄 턱이 없는 시절이었건만 그곳의 이사 김정완 씨는 우선 임시 직원으로라도 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고집과 열의가 마침내 나를 다시 복직시켜 주어,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지내게 되었고, 함안에 가자마자 첫아들도 낳았다.

  그러자 곧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어 세상 살기가 날로 어려워져 갔다. 농작물 공출 때문에 식량 부족이 도시에서 사는 사람 못지 않게 심했다. 이러한 시기를 맞아 변절하는 문인들이 생기고 우리글로 된 신문, 잡지들이 못 나오게 되어 갔다. 내 시를 발표할 곳도 없어졌다.

  농민들은 식량을 공출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인력 공출도 해야 했다. 이른바 보국대라 하여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만드는 공장이나 탄광에 끌려갔다. 지원병이란 이름 아래 젊은 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한번 간 삶은 예정한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예사였다. 그 무렵의 내 동시도 슬플 수밖에 없었다.

"개나리꽃 들여다보면 눈이 부시네/노란빛이 햇볕처럼 눈이 부시네./잔등이 후꾼후꾼 땀이 배인다./아가, 아가, 내려라. 꽃 따 주께.

아빠가 가실 때는 눈이 왔는데/보국대 보국대, 언제 마치나?/오늘은 오시는가 기다리면서/정거장 울타리의 꽃만 꺾었다."(<개나리꽃>)

  강제로 끌려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 아들딸들의 마으을 노래한 것이었지만 이런 시나마 쓰지 않고서는 내 울분과 적막감을 누를 길이 없었다.   

  내가 함안읍에서 가야면으로  옮아왔을 때는 전쟁이 점차로 가열되어 한동안 보류되었던 금융 조합 직원도 보국대에 끌려가게 되었다. 큰아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우리말 우리글을 쓰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나는 내 동시들을 모아 붙인 공책을 국어책으로 삼아, "뒷산 부엉이 부엉부엉 운다/동무 동무 없다고 부엉부엉 운다" 같은 것을 읽어 주곤 했다.

  가야에서 나는 젊은 청년들과 가까워졌다. 지원병으로 나가라는 강요에 시달리고 징용에 끌려가게 될지도 모르는 그들은, 그 지독한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고도 내게서 무슨 시원한 말이라도 듣고 싶어했다.

  정말 막막한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일본의 노예로 사는 것만이 가장 정당하고 옳은 것 같은 그런 시대였다. 그런 공기 속에서 젊은이들의 눈이 빛나고 핏대가 서는 걸 보고 든든해했을 따름이었다. 나는 밤이면 그들과 수리 조합 둑에 모여 앉아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때 그 젊은이들이 다 어디로 가서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 고등학교 선생으로 있는 그 중의 한 사람을 면해 전에 만난 적이 있을 뿐이다.

  일천구백사십오년 팔월에 나는 그 가야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요행히 노무 동원에 끌려가지 않고 그날을 맞이했던 것은 나로서는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담담하게 해방을 맞았다.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친일 분자의 하나로 남들에게 보였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디 살아 있을 수조차도 없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많던 충성스럽던 친일 인사들이 어떻게 우리 민족으로 돌아올지 궁금했다.

  급한 대로 나는 지방 자치 위원회를 만들고, 한글 강습회를 열고, 강연회를 갖고 하는 어수선한 일을 하다가 그해 가을에 시골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와 학교 선생이 되었다. 그곳에 계속해서 있다가는 문학이란 꿈만 꾸다가 죽도록 금융 조합의 직원 노릇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해가 다 차기 전에 다시 출판사로 일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뒤에도 나는 우리 민족에게 닥쳐든 가지가지 어려움과 아픔과 죽음들을 당하고, 겪고, 보면서 문학이 가질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특히 아동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생각과 길은 더욱더 어려운 것임을 뼈저리게 깨닫기도 했다. 지금 사회 구성원이기보다는 앞으로의 사회인이 될 이들에게 주어질 문학이니 말이다.

  아동을 상대로 하는 문학, 곧 아동 문학을 동심 문학이라 하는 것, 거기 관련해서 아동을 천사로 보는 천사주의 문학이라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한 비판도 필요했다. 해방이 되었으니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짐작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나는 시만으로써는 도저히 내 가슴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나타낼 재주가 없어 해방된 두해 뒤부터 동화와 소년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첫 번 장편이 일천구백사십칠년의 <숲속 나라>와 <오월의 노래>였다. 앞의 것은 천진한 아이들이 외세를 배격하며 밝은 나라를 건설하는 얘기이고 뒤의 것은 제국주의 일본 시대에 수난받은 아이들의 얘기였다.

  아무튼 일흔이 된 이 나이까지 쓴 내 작품이 모두 이런 것이라 내 길은 여전히 가시밭길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길을 버리지 않고 지켜 온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출처 : 어린이책 시민연대 서울
글쓴이 : 우문희(용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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