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영화는 재미없어." < 오월애(愛) > 에서 촬영 보조를 맡았던 김상구군(15)이 아빠 김태일 감독(49)을 향해 '훅' 한 방을 날렸다. 김 감독이 '어이쿠' 소리와 함께 손을 이마에 갖다 대고는 익살맞게 잠시 휘청했다. 잠시 입을 삐죽 내민 사춘기 소년은 "그래도 < 오월애 > 는 뭐…, 그중 괜찮았어"라며 아빠를 달랜다.
2010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배급지원 펀드를 받기 전까지 영화 작업은 장모님에게 빌려 쓴 돈으로 빠듯하게 진행되었다. 그래서일까.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온 가족이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홈 스터디 대신 '홈 플레잉(Home playing)'을 하고 있는 김 감독의 아들 상구군은 카메라 삼각대를 들고 아빠를 따라나섰다.
공동 연출이라고 해도 무방한, 엄마 주로미씨(49)는 조감독을 맡았다. 공식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5월의 주역'들은 찾아내기도 어려웠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인터뷰이들의 회의적인 방어벽은 높았다. 또한 고문으로 인해 오랜 기간 몸과 마음이 상해 있기 일쑤였다. 지난 2년간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은 대개 주씨의 몫이었다. 주씨는 "광주 얘긴 또 뭣허러 혀. 다 쓰잘데기 없어잉~" 하며 손사래를 치는 증언자들과 마음을 포개가며 함께 울고 웃었다. 지난해에는 3개월 정도 아예 짐을 꾸려서 가족이 광주 대인시장 근처에 작은 방을 하나 구해 먹고살기도 했다. 그리하여 탄생. '상구네 프로덕션'은 김 감독네 사람들이 같이 만든 < 오월애 > 제작사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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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혜 < 오월愛 > 를 만든 '상구네 프로덕션' 사람들이 5·18 자유공원을 찾았다. 왼쪽부터 아들 김상구군, 아빠 김태일 감독, 딸 김송이양, 엄마 주로미씨. |
'폭도의 도시'였던 1980년 5월의 광주는 세월이 지나면서 '민주화의 도시'로 인정받았다. < 꽃잎 > 을 시작으로 < 화려한 휴가 > 까지, 조심스레 그날의 광주를 이야기하는 영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5·18 특별법으로 명예회복과 일정한 보상이 이루어졌고, 숨어서 찾아야 했던 망월동 묘지는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상구네 프로덕션이 만난 광주는 그럼에도 여전히 가려져 있는 민초들 이야기에 집중했다. 단순히 그날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날을 가슴에 묻은 채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육성을 담았다.
등장하는 인터뷰이만 40명이 넘는다. 무엇보다 당시 5·18 민주항쟁을 가능케 했던 이름 없는 수많은 '여성'의 이야기는 인상적인 발견이다. 이들의 흐벅진 전라도 사투리는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듯 생생하다. 김 감독은 일부러 자막을 넣지 않았다. "말보다도 그들의 한숨, 표정 등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을 관객이 알아봐주길 바라요. 머뭇거림의 찰나, 그런 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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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항쟁을 가능케 했던 사람들은 이름 없는 시민이었다. 이들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양동시장, 대인시장에서 '보통의 일상'을 살아간다. |
"가까이서 듣고 위로해주는 다큐 찍고 싶다"
김태일·주로미 씨 모두 광주 출신이 아니다. 김 감독은 경북 예천, 주씨는 서울이 고향이다. 1980년 5월, 고등학교 2학년이던 두 사람 역시 광주를 '폭도의 도시'로 알고 자랐다. 대학에 입학해 광주의 '진실'을 알았을 때의 빚진 마음, 시인이 되고 싶었던 문학청년 김 감독의 인생도 그때 조금 '비틀어졌다'. 군 제대 후인 1987년 5·18을 다룬 다큐멘터리 < 어머니의 노래 > 를 보고 다큐멘터리의 힘을 깨달았다. "덜 부끄럽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시기에 그 다큐멘터리를 만났죠. 당시 대학 동기들이 '현장'으로 많이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내가 왜 그렇게 미안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잡기 시작한 카메라. 김 감독은 1993년 원진레이온 산업재해를 다룬 다큐 < 원진별곡 > 을 시작으로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다룬 < 어머니의 보랏빛 수건 > 과 인혁당 사건을 다룬 < 4월9일 > 까지 특유의 우직함으로 늘 역사적 사건의 한가운데로 성큼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3년 전, 전체 10부작 정도의 '민중의 세계사'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그 첫 신호탄으로 광주의 시간을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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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도청 철거 문제는 광주 지역의 '뜨거운 감자'였다. 김태일 감독은 이 문제에 카메라를 들이댐으로써 5·18을 낭만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
영화 속에서 여전히 양동시장에서 과일 노점상을 하는 당시 '주먹밥 아줌마'는 이제 5·18 기념식에서조차 부를 수 없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음은 엉망이지만 가사만은 또렷하다. 이게 다 30년 전 그날 배운 노래라고,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고,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이 노래 가사가 다 의미가 있었다고, 그녀가 말한다. 그녀의 노랫소리를 따라 시사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훌쩍임도 함께 커졌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싸웠던, 그들이 관객들에게 가만히 안부를 묻는다. 거기 당신, 잘 지내고 있느냐고. < 오월애 > 는 5월12일 개봉한다.
장일호 기자 / ilhostyle@sisain.co.kr
http://zine.media.daum.net/sisain/view.html?cateid=100000&cpid=131&newsid=20110513101649545&p=sis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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