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페리 박사의 '개로 길러진 아이'를 편한 마음으로 읽기는 쉽지 않다. 극단적인 상처를 입고 바들바들 떨며 겨우 살아가는 아이들, 그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박사의 경험은 소아정신과 의사인 나를 부끄럽게 한다. 책상 뒤 편한 의자에 앉은 채로 지옥에서 잠시 걸어 나온 아이를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망 없는 일인가? 이 책을 읽다 보면 페리 박사가 지난 20년간 아동 트라우마 연구의 첨단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동력이 다름 아닌 아이들을 이해하려 하고 진심으로 사랑한 그의 태도에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그가 치료를 담당했던 열 가지 사례가 시간 순서대로 나와 있다. 사례는 사례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사례를 통해 아동기 외상과 치료에 대해 이론을 정립하였고 새로운 치료 방향을 제시하였다. 사례는 그에게 최고 스승이었는데 이는 정신의학의 위대한 선구자들과 마찬가지다. 진심으로 환자를 도우려는 자들은 늘 책이 아닌 환자들로부터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막연한 사례보고서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심리, 즉 마음은 뇌 또는 신경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실체는 하나이고 우리에게 보이는 현상이 두 가지일 뿐이다. 현대 정신의학은 이 둘을 연결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심리치료는 과거의 갈등을 해소하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여는 것이지만, 바꿔 말하면 신경회로망의 변화를 통해 두뇌 활성도 분포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페리 박사의 책엔 이러한 현재 정신의학의 최신 식견이 잘 설명되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트라우마는 물론 스트레스, 기억, 습관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어떻게 과학은 설명하고 있는지 배울 수 있다.
아이들 중 40%는 어른이 되기 전에 한 번 이상의 심각한 트라우마를 경험한다. 부모와 형제의 죽음, 가족의 해체, 학대와 성폭력, 사고와 재해 등 트라우마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은 상처를 받지만 또 쉽게 잊어버린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상처는 특별히 도와줘야 할 일이 아니었다. 쉬쉬하고 못 느끼게 했고, 아이에겐 빨리 잊으라고 강요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강요하면 잊은 척한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상처를 입었기에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 속으로 삭인다. 상처는 속에서 곪아 성격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다. 두고두고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트라우마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성장 과정에 있는 두뇌이기에 더 민감하고 아직은 충분한 회복력을 키우지 못해 온몸으로 충격을 받는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다만 보이지 않은 채 내면을 모두 잠식해 간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와야 할까? 우선 상처 입은 아이들 옆에 머물러야 한다. 옆에 머무르면서 세심하게 돌봐주어야 한다. 믿을 만한 어른이 아이 옆에서 믿을 만한 행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머지는 아이 내면의 힘으로 치유한다.
페리 박사에 의하면 치료 프로그램은 중요하지 않다. 잘못된 치료는 불쾌한 기억만을 되살려 아이를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 오히려 아이와 주변 사람들과 관계의 질을 개선하고, 관계의 양을 늘리는 편이 도움이 된다.
이 책의 백미는 마지막 장이다. 그는 트라우마 연구에서 얻은 깨달음을 사회적인 제안으로 확대한다. 트라우마는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이 살면서 트라우마를 겪더라도 회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그는 공동체를 복원하고 아이들이 애착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개인이 고립되는 우리 사회는 그 자체로 아이들에겐 가장 큰 위험요소다.
[서천석 의학박사ㆍ소아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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