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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시간

[책과 삶]한국은 애초부터 안중에 없고 일본의 안전만 신경쓴 ‘맥아더의 실체’

맥아더와 한국전쟁…이상호 지음 | 푸른역사 | 458쪽 | 2만5000원

 

 

 

 



더글러스 맥아더는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우리 현대사의 중요 인물이다. 6·25전쟁 때는 유엔군 사령관으로 한반도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요즘은 인천 자유공원에 세워진 그의 동상의 철거 여부를 둘러싼 한국 사회 진보·보수의 이념대치 전선으로 등장해 죽어서까지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한국 사회 친미보수 진영에 맥아더는 한민족의 은인이다. 한반도를 거의 삼킬 뻔한 ‘북괴’를 휴전선 이북으로 쫓아낸 영웅은 죽어서도 친미보수의 아이콘으로 빛나고 있다. 물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추앙받을 수 있지만, 맥아더가 한국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친미보수주의자들에겐 안타깝게도 맥아더는 기실 한국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일본의 안위에만 신경썼다.

한국인의 시각으로 맥아더와 한국전쟁을 조명한 <맥아더와 한국전쟁>은 맥아더 숭배자들이 애써 외면하려 할 역사적 사실들까지 찾아내 입체적으로 맥아더의 실체를 추적했다. 학술적으로 접근했기에 ‘제국주의 살인마’란 단편적 규정도 거부한다.

한국전쟁 발발 후 패퇴를 거듭한 남한이 극적으로 만든 역전의 계기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다. 적의 후방을 우회해 보급병참선을 공격하는 ‘섬 건너뛰기 작전(Island Hopping Operation)’은 태평양전쟁에서 맥아더가 즐겨 사용한 전법으로, 인천상륙작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개전 후 몇 개월 동안과 흡사하게, 다만 방향이 북으로 바뀐 상황에서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맥아더는 중국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봤기에 한국전 승리를 낙관했으나, 실제 전쟁은 그의 예상과 달리 전개됐다.

중국의 참전으로 전황이 악화한 1950년 12월30일 맥아더는 중국 보복책을 건의했다. 중국 해안 봉쇄 및 본토 공중폭격, 대만 국민당 군대의 활용 방안 등을 제안했다. 며칠 뒤인 1951년 1월6일 맥아더는 한국군에 추가로 무기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 시급한 것은 일본 경찰예비대의 증강”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즉 자원이 한정돼 있어 일본 경찰예비대와 한국군 모두에 무기 제공이 가능하지 않다면 한국군보다는 일본의 안전보장을 강화하는 데 자원을 사용하는 편이 미국의 전반적 이익에 부합한다는 생각이다.

그즈음 미 국무부는 한국 관료들을 소개시켜 제주도 등에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합동참모본부와 논의했다. 이때 맥아더는 미군을 최대한 신속하게 한반도에서 철수시키자고 미 정부에 제안했다. 자신의 기본적 임무는 1차적 우선순위로 일본 방위를 맡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군대를 일본으로 철수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맥아더의 희망과 달리 미국의 전쟁정책이 확전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주한미군 철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일본 중시는 장군으로서 일시적 전략적 판단이라기보다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관된 것이었다. 맥아더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전후 배상 문제에 있어 시종일관 일본의 입장을 지지했다. 일본의 전후 배상은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고통받은 식민지 국가들엔 자립경제를 이룰 기본 재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일본의 경제부흥을 위해 이러한 전후 배상을 거부했다. 또한 식민지 각국에서 강탈된 문화재 반환에 대해서도 일본 국내의 반발을 이유로 수용하지 않았다.

애치슨 라인으로 알려진 미국 방위선에는 맥아더의 아시아 전략 구상이 반영됐다. 이 선은 알류샨 열도를 지나 일본 열도를 거쳐 괌으로 이어지는 U자형으로 한국과 대만은 제외됐다. “미국의 서부인 캘리포니아를 보호하듯이 한국을 보호하겠다”는 화려한 수사와 달리 한국은 애초에 안중에 없었던 셈이다. 맥아더의 생각은 미국인 장군으로 자신의 판단력과 국익에 근거한 것이기에 나무랄 이유는 없다. 그는 그저 군인이었고 제국주의 침탈로 인한 식민지 민중의 고통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국내외에서 주목받은 엘리트 장군으로 자신의 입장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한 전형적인 군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 사회 일각에 존재하는 맥아더 숭모 열기가 매우 희극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동시에 맥아더가 한국 내 친미보수 진영으로부터 숭앙받을 토양도 존재한다. 맥아더는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였다. 공산주의는 전염성이 강한 질병으로 강제적으로 박멸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하지의 상관인 맥아더의 이런 태도는 안 그래도 공산주의 봉쇄의 일선에 위치한 남한의 미군정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을 법하다.

맥아더는 반공주의자이며 동시에 기독교 우월주의에 젖어 있었다. 문제는 개인적인 신앙을 점령지에서 구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 싶어했으며 일본 ‘천황’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문제로 고민했다. 기독교 신앙의 확산이 아시아를 통합하고 더 나아가 공산주의와 같은 악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불굴의 영적 방어막’을 세우는 것이라는 맥아더의 주장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다. 게다가 인종주의적 편견까지 맥아더는 인간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확실히 아니다.

대신 맥아더를 단지 한국전쟁 초반을 책임진 군인으로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는 군인으로서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에서는 그렇게 대단한 군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312032485&code=900308

 

어린시절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들은 맥아더는 한국인의 영웅쯤으로 배우고 자랐다.

그러나 맥아더는 그냥 미국 장교일뿐이다.

그가 아무리 정말 우리나라만을 위해 몸바쳐 싸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