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누구나 겪는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끝 모를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는 일 말이다. 난파선 조각에 얹혀 홀로 망망대해를 떠도는 형국이랄까. 땡볕에 목은 타들어가는데 사방천지가 물이건만 바닷물은 마실수록 갈증만 더욱 심해질 뿐이다.
여기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이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다. 밭에 있는 농작물을 몽땅 먹어도, 나무에 열린 과일을 모조리 해치워도, 눈앞에 있는 건 뭐든 닥치는 대로 먹고 자기가 살던 숲마저 걸신들린 듯 먹어치워도 허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배고프고 마음 허전한 사내는 방앗간 집 딸, 금발의 마리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그리 쉽게 풀리지 않는 법, 괴물에게 딸을 줄 수 없다며 마리 아버지가 결사반대를 하고 나선다. 배고픈 사내가 사정한다. 자신은 오랫동안 혼자 살았고 어머니의 다정한 손길과 사랑을 조금도 받지 못했다고. 그래서 허전한 탓에 이것저것 자꾸 뱃속에 넣는 거라고, 아내가 있다면 이 허기를 달래줄 거라고. 그러나 마리 아버지는 사내를 박정하게 내쫓는다.
<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 > 쿠어트 바우만 글, 스타시스 에이드리게리치우스 그림, 이옥용 옮김, 마루벌 펴냄 |
연민에 가까운 고통스러운 공감
배고픈 사내가 자신의 증상이 애정 결핍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때 고개를 끄덕이던 독자들은, 찍소리 없이 사라졌던 사내가 7년 뒤에 나타나 복수를 선언하는 순간 당황한다. 사내는 마리 아버지를 집어삼키고 마리를 삼키고 방앗간과 농장을 먹어치운다. 이윽고 감옥에 갇히자 온몸을 흔들어대며 웃다가 거치적거리는 쇠사슬을 삼키고, 말리는 간수들을 삼키고, 쇠창살까지 삼켜버린 뒤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버린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사내는 잔혹하다기보다는 허허롭다. 연민에 가까운 고통스러운 공감을 끌어낸다. 복수는 좌절의 다른 얼굴이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은 뱃속에 쓸어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끝없이 이어지는 도돌이표다. 부조리극이 말하듯 인간은 불안과 절망과 혼돈에 휩싸인 버려진 존재인가, 자신의 운명을 제어하려는 몸부림은 헛된 것인가. 이 책은 우리 내면의 어두운 심연에 파문을 일으킨다.
배고픈 사내가 사라진 뒤, 가면은 텅 비었다. 공허한 눈도, 끝없이 무언가를 씹어 삼키던 입도 사라졌다. 눈·코·입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새 두 마리가 푸른 하늘을 날고 초록 풀밭에 나무 한 그루가 우두커니 서 있다. 이런 그림책도 있다.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편집자) / webmaster@sisain.co.kr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3122116001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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