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단정하지 않다. 옷은 소매가 너덜거리고, 차는 몸체가 덜컹거린다. 책은 색이 바래고, 삭아 바스라지기도 한다. 몸도 낡으니 머리숱이 빠지고, 주름은 깊어지며, 뼈도 군데군데 시큰거린다. 그러나 이 모든 낡은 것은 사실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오래 묵은 것들이다. 그리고 모든 오래된 것에는 시간이 녹아들어 있고, 당연 시간이 빚어낸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당산나무가 있다. 몇 백 년 동안 마을을 내려다보며 사람들과 산언덕을 지켜온 나무들이다. 사방 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인 우리네 마을에는 어디에나 마을 끝 산자락에 당산나무가 있었다. 사람들은 나무 앞에서 한 해 삶의 따스한 자리를 갈급해하며 제를 올렸고, 나무 곁에 주저앉아 마을에서의 사람살이를 애틋하게 굽어본 다음 엉덩이를 털며 다시 일어서기도 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그 우람한 둥치를 타고 놀며 잔뼈가 굵어졌을 것이며, 그들이 멀리 떠나 있다 돌아왔을 때 맨 처음 반기던 것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킨 당산나무였을 것이다.
< 당산 할매와 나 > 윤구병 글, 이담 그림, 휴먼어린이 펴냄 |
대학의 철학 교수직을 마다하고 홀연 농촌공동체를 일구겠다는 윤구병 선생 또한 변산의 볕 잘 드는 농촌 마을에서 한 그루 당산나무를 만난다. 선생은 이 나무를 보는 순간, 삶의 모든 곡절을 고스란히 늙고 오래된 제 몸에 아로새긴 '할매'를 본다. 옹이와 생채기가 가득하고, 둥치마저 헛헛하게 빈, 키는 조금씩 졸아든 당산 할매는 어김없이 그의 할매이며, 우리 모두의 할매이다. 하여 선생은 마침내 떠나지 못해, 그 곁에 둥지를 틀고 공동체를 일구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그림책은 윤구병 선생이 시골 마을을 지키고 선 당산 할매를 만나고, 그이와 함께 계절을 나고, 함께 마을과 학교를 이루고, 마침내 할매를 떠나 다시 홀로 새로운 길 위에 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넓은 화폭 속에 그림 작가 이담은 할매의 형상과 함께 윤구병 선생의 마음속 표상으로 존재하는 형상까지 정밀하게 부조해낸다. 갈색을 주조로 펼쳐지는 그림책은 하루의 변화, 계절의 변화, 세월의 변화에 맞게 당산 할매와 함께 할매와 하나를 이루는 풍광과 사람을 깊이, 곡진하게 표현하고 있다.
회화에 못지않은 입체감과 깊이
왁스 페인트를 녹여 덧칠하고, 날카로운 철핀으로 거듭 긁어내는 거친 기법의 질감은 섬세한 세부의 복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담의 뜨겁고 생생한 붓질은 기법 전체가 재현의 대상과 조응하는 가운데 다소 넓은 시야로 보면 그 어떤 회화에 못지않은 입체감과 깊이를 너끈히 전달하고 있다. 그림책을 펼치며 마주치게 되는 화면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그림이 됨은 물론이거니와 화면을 이어갈수록 응집과 확산, 집중과 이완 속에서 읽는 이로 하여금 느꺼운 정서적 출렁거림을 경험하게 만든다.
나는 이 그림책이 우리 아이들의 세계를 담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이 몸담고 있는 세계는 낡고 오랜 공동체와는 대척에 놓인 자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본은 오래된 것과는 상극이다. 자본은 새것을 전적으로 선호한다. 그것이 이른바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래된 주제에 턱하니 기품을 지니고 있고, 장엄한 존재감으로 외경을 불러일으킬 때, 자본이 느낄 불쾌감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 존재가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할매와 같은 당산나무일 때에야. 그러나 자본이 느낄 그 불쾌함 때문에라도 오히려 이 그림책이 우리 아이들의 손에 놓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자본과 맞서는 흔치 않은 길 중 하나이기에.
김상욱 (춘천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 webmaster@sisain.co.kr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31129081910722
윤구병 선생님을 처음뵈었을때 흔히 시골에가면 밭에서 뵙는 농부 아저씨 같다고 생각하였다.
정말 자연을 사랑하는 선생님...
<당산할매와 나>는 나에게 특별한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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