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는 지도책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길을 찾아가는 드라이브가 큰 즐거움이었다. 남들 다 다는 내비게이션을 갖춘 지금은, 편하기는 하지만 이런 즐거움과 성취감을 잃어버린 게 아쉽다. 내비게이션 떼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면 속도위반 벌금과 벌점이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 대신 들여다보며 즐거워할 그림책을 발견했다. < 우리 땅 기차 여행 > . 지도 그림책은 드물지 않게 나오지만 우리 땅 전반을 이렇게 포괄적으로 꼼꼼하게 담아낸 그림책은, 내 기억에는 없는 것 같다. 서울을 출발해서 광주까지 호남선 경로, 광주에서 부산까지 경전선 경로, 부산에서 정동진까지 동해남부선과 중앙선과 영동선 경로가 한반도 아래쪽 가장자리 해안을 착실하게 훑어간다. 그러면서 안쪽 내륙도 빼먹지 않고 보여주니 그림책 버전 대한민국 여행전도라고 해도 될 듯하다. 시원스럽게 커다란 판형, (산들의 제각각 높이까지 차별적으로 실감나게 구현하려 노력한) 입체적인 그림, 깨알 같은 정보와 아랫단에 릴레이로 펼쳐지는 세 팀의 기차여행기 등등이 지도 그림책다운 아기자기한 재미를 준다.
< 우리 땅 기차 여행 > 조지욱 글, 한태희 그림, 책읽는곰 펴냄 |
'지도가 닳도록 들여다보며' 만들었다는 기획자와 '눈이 빠지는 줄 알았다'는 일러스트레이터의 말이 으레 하는 엄살로만 들리지는 않으니, 독자로서 그에 상당하는 성의를 보여야 할 것 같아 그림을 하나하나 뜯어본다. '국민학교' 시절 전라도 광주에서 상경해 오래 살았던 삼선교, 그 동네 뒷산이었던 낙산이 한눈에 보인다. 이 뒤 어디쯤에 지금은 성곽 둘레길 조성으로 없어진 옛날 우리 집이 있었겠구나.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와 방학을 함께 보내기 위해 광주에서 강원도 원통으로 가던 온 가족의 기나긴 여행길도 마음속에 따끈하게 되살아난다. 밤기차로 떠나 새벽에 돌아오는 여행 아니면 여행 같지도 않게 여겼던 대학 시절, 아름다운 바다 풍경에 대한 감탄에 허기도 늘 따라다녔던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여정으로도 기억은 옮아간다. 어라, 이 책이 아이들에게는 새롭게 알아갈 우리 땅에 대한 정보와 흥미를 줄 수 있겠지만, 이 어른에게는 이렇게 오래된 사진첩과 일기 노릇도 해주는구나.
그러고 보니 지도를 본다는 일의 의미가 새삼스러워진다. 그것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뿐만 아니라 어디에 있었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혹은 가고 싶은지도 일깨워준다. 장소뿐만 아니라 시간에 대한 감각도 벼리어준다.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희망이 버무려져 지금의 나를, 지금 이 순간만은 제법 그득하게 채워주는 것 같다.
김서정 (아동문학 평론가) / webmaster@sisain.co.kr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31228183510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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