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그림책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림이 좋으면 글이 부실하고, 글이 좋으면 그림이 위축된다. 서로 다른 두 매체가 만나 견고하게 결합하여 마침내 또 다른 이야기의 세계를 펼쳐내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으랴. 더욱이 그림책에는 두 매체의 결합을 중재하는 편집자의 구실 또한 만만치가 않다. 충돌하고 튕겨나가는 두 매체를 잇대는 작업은 편집자의 몫이다. 그러니 정작은 둘이 아니라 셋이 함께 만나 이루어내는 속 깊은 화음의 세계가 완성된 그림책의 세계이다.
아름다운 색상, 섬세한 붓끝
최근 이 완성태로서의 그림책을 마주한 적이 있다. 이민희가 글을 쓰고 박미정이 그림을 그린, 덧붙여 편집자가 공들여 함께 작업한 < 얼굴나라 > 라는 작품이다. 글은 '여용국평란기(女容國平亂記)'라는 조선 후기의 수필을 바탕으로 이민희가 다시 쉬운 말법으로 고쳐 썼으며, 그림은 현대적인 미감을 충분히 살려 글 속에서 미처 담아내지 못한 독창적인 인물 형상과 정교한 묘사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부드러운 갈색과 청색, 분홍색을 넓게 펼쳐내고 검은색 혹은 붉은색 악센트를 가미한 색상의 아름다움, 정교한 붓끝에서 살아나는 디테일의 섬세함, 숱하게 등장하는 다양한 화장 도구들의 생동하는 의인화 등 공들인 그림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이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얼굴나라 > 이민희 글, 박미정 그림, 계수나무 펴냄
더욱이 작품이 담고 있는, 나라를 다스리거나 스스로의 얼굴을 간수하는 일의 위중함이라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주제에 압도되지 않는 이야기의 힘 또한 인상적이다. 얼굴나라에는 여왕과 함께 가장 충직한 신하인 거울, 그리고 아홉 문신과 아홉 무신이 있으며, 이들 가운데 얼굴(머리)을 치장하는 데 쓰이는 머릿기름·참기름·수분·면분·연지·곤지·기름종이·비녀·향수가 문신이며, 얼굴(머리)을 다듬는 데에 쓰이는 얼레빗·참빗·칫솔·세숫물·수건·휘건·비누·족집게·모시실이 무신이라는 것이다. 이들 각각은 여왕이 게을리 방치한 탓에 쳐들어온 땟국과 머릿니와 잔털, 이똥 들을 힘을 모아 물리친다. 이 장쾌한 서사를 이야기는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이끌어가고 있으며, 그림은 유머러스하고 섬세하게 세부를 형상화하며 활달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사실 우리 그림책의 서사를 지탱하는 중요한 곳간은 옛이야기들이었다. 옛이야기의 일차원적인 세계가 그림책의 서사로서 손색이 없는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옛이야기의 민중적 세계상이 어린이의 성장에 필요한 자양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비전승으로 이어져온 옛이야기뿐만 아니라, 기록문학으로 존재했던 문헌설화들에서도 어린이문학이 적극적으로 끌어와야 할 이야기가 만만치 않게 널려 있음을 이 그림책은 보여준다. 어느새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편견을 지녔던 셈이다.
이 그림책이 지금·여기에서의 우리 그림책에 안겨주는 의미망은 결코 심상하지 않다. 전통의 재창조를 비롯하여 옛글 속에 내재된 힘을 보는 안목, 그것을 그림을 통해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독창성, 글과 그림, 편집이 서로 협응함으로써 획득되는 완미함 등은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 아이들의 그림책 읽기는 이 모든 것을 포획할 필요는 없다. 그저 깔깔거리며 예쁘다, 재미있다는 감탄이 터져나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과 달리 그림책을 읽는 행위는 전적으로 즐겁고 또 즐거운 활동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김상욱 (춘천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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