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는 시간

[그림 읽어주는 남자] 권윤덕의 ‘꽃할머니’

 

권윤덕의 ‘꽃할머니’

한 소녀가 있었어요. 1927년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났고요. 소녀는 열두 살이 되던 해 봄, 산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그만 대만의 위안소로 끌려갔지요. 전쟁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왔으나 소녀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일시적 기억상실증을 앓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성노예의 진실을 고발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할머니가 되어 있었죠. 할머니는 위안부의 역사적 진실과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 한 주도 쉬지 않고 참석했고, 그 사이에는 스스로의 치유를 위해 꽃그림 작업을 하셨어요. 눌러서 말린꽃으로 꽃그림을 그렸답니다.

2007년 무렵이었을 거예요. 그림책 작가 권윤덕이 그 심달연 할머니의 삶을 알게 된 것이 말예요. 그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꽃할머니’ 그림책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실은 무섭고 잔혹하고 끔찍한 이야기지만, 고통을 공감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고 그 공감의 마음과 연대가 평화를 일궈나갈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림은 황토 빛 대지와 푸른 새싹에서 시작됩니다. 삶의 바탕이 대지에 있고, 그 대지의 딸들은 땅의 따님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더 누런 황토 빛으로 위장한 일본군들이 검은 치마 흰 저고리의 밝달 소녀를 잡아챕니다. 머리를 땋아서 동여 맨 빨간 댕기는 소녀의 힘찬 생명일 것입니다. 그러나 위장 군복의 가식과 폭력은 소녀의 몸과 마음을 파랗게 멍들입니다.

표지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꽃할머니’의 상징 주제화(花)는 제비꽃입니다. 꽃 모양이 하늘을 나는 제비를 닮았다고 해서 제비꽃이요,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삼짇날에 꽃이 피어서 제비꽃이라 하지요. 남쪽으로 끌려갔다가 돌아 온 할머니의 삶이 엿보입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제비꽃을 오랑캐꽃이라고도 부르지 않았겠어요? 이용악 시인은 시 ‘오랑캐꽃’(1939)에서 “긴 세월을 오랑캐와 싸우면서 살았다는 우리의 먼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 태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 같은 까닭이라”고도 노래했지요.

제비꽃 꽃잎은 그림책 속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곳을 떠다닙니다. 파랗게 멍들어 지울 수 없는 곳들에서 꽃잎은 흩어집니다. 그것은 폭력의 상징이면서 또한 치유의 상징일 거예요. 소녀는 멍들어 쓰러져도 빨간 댕기를 꼭 쥔 채 숨을 놓지 않습니다. 모란꽃도 그 옆에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 돌아 온 할머니는 오랫동안 거리에서 폭력의 진실을 알렸어요. 그곳에 노란 나비 떼가 날아다니네요. 가해자, 피해자 모두를 위한 날개 짓이 아닐까요?

2010년 겨울, 할머니는 조용히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작가는 그림책 말미에 베트남, 보스니아, 콩코, 이라크 전쟁을 이야기합니다. 할머니는 갔으나, 성노예의 현실이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정책개발팀장

 

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780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