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해문 아이들 노래와 놀이, 이야기를 연구하고 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동무 동무 씨동무』(창비), 『가자 가자 감나무』(창비)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소나무) 같은 책을 썼습니다.
올해 나이 마흔둘이다. 늦게 짝을 만난 덕에 이제 곧 네 살을 앞둔 딸과 아내, 셋이서 경북 안동에 살고 있다. 시내에 살다가 시골로 살림을 옮긴 지 8년째다. 우리 가족 사는 모습은 귀농은 아니고, 귀촌 정도라고 봐야겠다. 나름대로 따로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노는 일이다.
대학원에 다니면서부터 옛날 아이들이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 몇 년 동안 우리나라를 한 바퀴 돌며 조사했다. 벌써 십 년 전이다. 이렇게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옛 아이들 놀이와 노래에 대해 묻고 녹음하고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아이를 둔 부모와 교사들에게 놀이와 노래와 이야기를 가르치러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맞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놀이고 노래고 이야기이고 가르치면 되는 줄 알았다.
놀이야 미안해
대학에 잠시 있으면서 놀이에 관한 논문을 몇 개 썼으나 메아리 없는 학계에서 참으로 부질없는 일임을 깨닫고 지금은 대학교와 왕래가 거의 없다. 그에 앞서 2002년부터 공동육아 교사들과 만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르쳐 주신 놀이와 노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놀이 안내자’라는 좀 근사한 이름을 얻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나는 ‘어린이놀이운동가’라는 조금 낯선 이름을 스스로 쓰고 있다. 사회변혁운동이나 인권운동, 또는 환경운동처럼 어린이 놀이 또한 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에 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소박한 의미의 전래놀이나 민속놀이 같은, 지난날 아이들이 하고 놀던 놀이를 찾고 알리고 보급하는 일도 놀이를 아끼는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분명하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을 둘러싼 놀이 환경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아이들을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구석으로 몰고 있다. 또 전래놀이와 같은 형식적 놀이는 지금 아이들의 놀이문화를 감당하기 역부족이고 자기만족이나 기만으로 빠지기 쉽다.
나부터 돌아보려고 한다. 그동안 나는 겁 없이 놀이에 대해 바른말을 하고 돌아다니며 부모들 마음에 생채기를 입혔다. 그것은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라는 주문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이 세상에 온 단 하나의 까닭과 의무는 놀기 위해서니 아이들을 놀게 하지 않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라 했다. 그러나 어디 한국 사회가 아이들이 놀기에 그렇게 만만한가.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부모는 솔직히 없다. 이런 내 주장에 나서서 반대 의견을 내는 부모나 교사를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마냥 놀게 하는 부모나 교사도 만나기 어려웠다. 그러는 동안 노는 것과 공부 사이에서 갈등하고 힘들어하는 부모를 감히 매몰차게 나무라기만 했지 껴안는 일은 소홀히 했다. 너무나 당연해서 고개를 저을 수 없는 말로 부모들의 입을 막고 그들의 자책을 유도하며 홀로 만족감에 빠져 지냈다고 해야 옳다. 아이들을 놀게 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까닭을 애써 무시하고 쉽게 부모의 잘못으로 몰고 갔다. 내가 범한 가장 큰 잘못은 오늘을 사는 현실 속 아이들이 하고 있는 많은 놀이를 살피지 않고 옛 놀이, 다시 말해 전래놀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지금 아이들의 놀이문화를 잰 데 있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는 생각은 내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길어올린 명제였다. 물론 이 명제를 내가 폐기했거나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는 명제는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래도록 꼭꼭 숨겨둘 참이다. 이 명제는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어린 시절 ‘놀이의 힘’에 대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며 찾아낸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명제만 앞세운다면 너무나 달라진 놀이 환경 속에서 오늘을 사는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노는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그런 기로에 서 있다.
너무 잘 놀고 있는 아이들
내가 어려서 놀았던 놀이의 즐거움이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 놀이로 오늘 아이들을 덮어씌워 이해하려는 태도는 온당하지 않다. 골목도 마당도 같이 놀 또래도 없고 놀 틈도 다 빼앗긴 아이들에게 우리 전래놀이 하자, 민속놀이 하자며 이끌어도 되는 걸까. 그럴수록 우리는 아이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놀고 있으며, 무엇을 진정 좋아하고 재미있어 하는지 점점 모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학교와 학원과 집, 세 꼭짓점을 잇는 선에서나마 인라인스케이트라도 타면서 몸을 쓰려고 몸부림치는 아이의 처절한 ‘놀이본능’을 우리는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쉬는 시간을 10분에서 5분으로 줄이려는 야만적인 어른들 속에서 몸부림치며 교실과 복도에서나마 자투리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몸부림을 알 수 있을까 말이다.
지난 추억 속의 놀이를 꺼내어 오늘 아이들 놀이를 재단하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오늘 아이들이 즐기고 있는 놀이가 있다면 그 속에서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이들 놀이에 대한 예의일 테다. 막 네 살이 될 딸이 나를 정신차리게 한다. 딸의 놀이본능을 지켜보며 아! 이제는 추억 속 놀이를 내려놓고 아이들 현실 속 놀이로 들어가 다시 한 번 고되게 공부해야 할 때가 왔음을 느낀다.
이렇듯 옛 아이들 놀이와 오늘 아이들 놀이를 고루 볼 수 있을 때, 놀이에 대한 조화로운 이해에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아이들에게 어떤 놀이가 건강하고 아름다우니까 그 놀이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멈추고, 지금 아이들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무엇을 하고 노는지, 스스로 무엇을 하고 놀 때 정말 신이 나고 즐거운지 먼저 아이들에게 묻고 살피는 일이 꼭 필요하다.
놀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놀지 않으면 몸이 부서지기 때문에, 어느 외진 구석 어떤 열악한 조건에서도 아이들은 놀이의 싹을 틔우며 놀이본능에 몸부림친다. 놀지 않는 아이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내가 지닌 놀이에 대한 긍정이다. 여기서 아이들의 놀이란 무엇이냐, 전래놀이냐 컴퓨터 게임이냐, 바람직하냐 그렇지 않냐,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심지어 선이냐 악이냐 하는 판단은 접자. 그냥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가 무엇인지 먼저 따라가 보자. 그래서 아이들의 놀이가 눈에 좀 훤하게 들어왔을 때, 아이들 놀이에 대해 이야기해도 늦지 않으리라.
학교는 배움터인가 놀이터인가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너무도 잘 놀고 있다. 전혀 못 놀고 있지 않다. 아이들이 놀지 못하니까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이 내 목소리에 주로 담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 아이들은 사실 무엇을 하고 놀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주변이 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놀거리뿐만 아니라 먹을 거, 입을 거, 볼거리들이 무진장 널려 있다.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이런저런 놀거리를 즐길 수 있는 시간과 돈이다. 아이들은여기서 괴로워한다. 돈은 그렇다 치고 왜 아이들에게 시간이 없을까?
아이들은 재미없는 관계와 내용으로 가득 찬 학교와 학원과 그 안의 규율과 진도에 얽매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아이들은 돈도 없다. 부모는 쉽게 학습성과를 놓고 돈거래를 일삼고, 아이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사달라고 조른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돈이 생긴다. 그 돈으로 아이들은 많은 것을 소비한다. 아이들은 바야흐로 ‘소비 놀이’를 놀이의 한 영역으로 확실히 개척했다. 아니 개척했다고 착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개척한 자들은 따로 있는 데 말이다. 뒤에서 돈 세는 자들 말이다. 아이들의 ‘소비 놀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시간이 없고, 놀 곳이 없고, 놀 동무가 없다고 못 놀 아이들이 아니다. 놀 시간이 없다지만 좀더 살펴보면 아이들은 시간이 너무나 많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나 이런저런 학원을 예로 들어보자. 만약 아이가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거부한다면 학교는 얼마든지 놀고 장난칠 수 있는 곳으로 바뀐다. 또 부모들의 기대와 달리 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솔직히 그렇게 많지 않다.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아이들이 학원 가는 걸 순순히 따르는 가장 큰 까닭은 또래 동무들이 거기 다 모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학교의 존재 이유가 진정 무엇인지 실마리를 잡았으면 한다. 친한 친구를 쉽게 경쟁자로 만들어버리는 지금의 학교와 학원 속에 묻혀 있는 아이들 또한 우정을 나눌 동무를 몹시 목말라한다. 왜냐하면, 아이들도 사람이니까. 서로 반기고 위로해줄 친구가 누구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학교나 학원을 가는 가장 큰 까닭은 공부는 물론 아니고, 예나 지금이나 동무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이것이 학교의 가장 큰 존재 이유이다. 학교가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라는 생각은 근대적 사고에 의해 강요된 오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동무를 만나서 무엇을 하려는 걸까. 간단하다. 놀려고 한다. 동무가 있어야 장난도 치고 뛰어다니면서 놀 것이 아닌가. 이것이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의 존재 이유이자 구실의 가장 오래된 알맹이다. ‘학교’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곳에서는 이것을 잊지 말자. 학교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문제는 바로 학교는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러 가는 곳이 아니었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적어도 초등학교까지는 말이다. 놀이로 동무들을 만나고 그렇게 놀면서 우정을 쌓는 일이 학교의 본디 역할임을 다시 새겨야 할 것 같다. 함께 놀아야 우정을 쌓을 수 있다는 말이다.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우정어린 마음과 기쁜 표정으로 친구를 대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 아닐까.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노는 마음’이 저마다 자연스레 솟을 때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놀이의 반대는 일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며 학교는 배움터가 아니라 놀이터이기 때문이다. 노는 마음, 나는 이 마음 하나로 아이들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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