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한 현실의 상처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리얼리즘 소설. 보통 '문학상 수상작'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랬다. 이런 고정관념을 깨뜨린 주역은 2005년 신설된 세계문학상이다. '당선작 고료 1억 원'이라는 파격적인 대우에 신진 작가들이 몰려든 1회 세계문학상 당선작은 김별아 작가의 < 미실 > . 신라 선덕여왕 시대를 배경으로 왕권을 쥐락펴락했던 정계의 여장부 '미실'을 주인공으로 삼은, 흔치 않은 여성 역사 소설 < 미실 > 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세밀한 캐릭터 묘사와 방대한 역사 자료가 돋보이는 < 미실 > 이 영화 제작사들의 구미를 당겼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당시 굵직한 영화사 네 곳에서 판권을 사고자 경쟁을 벌였고, < 실미도 > (2003)를 공동 제작했던 한맥영화사가 판권을 구입해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쉽게도 결과적으로 영화화는 불발됐지만, 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 아내가 결혼했다 > (박현욱 작가)가 2008년 영화로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했다.
또한 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으로 소위 '칙릿'으로 분류되는 로맨스 소설 < 스타일 > 이 당선,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되어 인기를 모으면서 세계문학상은 영화 제작자들 사이에서 '황금 광맥'으로 급격히 부상했다. 5회 수상작인 정유정 작가의 < 내 심장을 쏴라 > 역시 영화 판권 계약이 완료된 상태다. 지난 3월 24일 개봉한 <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 > 는 '세계문학상 최종 후보작'에 오른 김민서 작가의 <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 가 원작이다. 한 영화 제작자는 "세계문학상의 경우 당선작 외에 최종심까지 올랐던 작품이라면 영화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수준"이라고 관심 열기를 전한다.
세계문학상 측은 "문학상 수상작의 선정 기준은 물론 소설의 완성도다. 내부적으로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수상작을 선정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심사위원을 맡은 기성 작가들이 기존의 리얼리즘 소설과 차별화된 신인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에 높은 점수를 준 경향은 있다"고 설명한다. 세계문학상이 예상치 못한 영화 제작사의 러브콜을 받은 경우라면, 세계문학상과 마찬가지로 '1억 원 고료'를 내건 뉴웨이브문학상(2007년 신설)과 멀티문학상(2009년 신설)은 전략적으로 OSMU(One Source Multi Use, 원 소스 멀티 유스)를 염두에 둔 공모전이다.
뉴웨이브문학상 관계자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는 21세기 스토리텔링 산업은 영화, 드라마, 뮤지컬, 게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어 문화 산업 전반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다. 현재 한국 문학계는 순수 문학을 중시하는 풍토가 강하다. 순수 문학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외국 소설과 영상 매체, 인터넷에 밀려 갈수록 독자들과 멀어지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변화가 필요하다. 뉴웨이브문학상은 문학적 완성도와 대중적 재미를 아우르는 흡인력만 있다면 팩션, 칙릿을 비롯해 SF, 스릴러 등 장르 구분 없이 수상작을 선정하고자 한다"는 신설 취지를 밝혔다.
출판사 위즈덤하우스와 방송사 SBS, 영화 투자·배급사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이하 쇼박스)가 함께 기획한 멀티문학상도 목적은 같다. "소설로도 가치가 있고, 이후 드라마와 영화화 등 영상 매체 전환이 가능한 작품을 찾자"는 것. 1회 뉴웨이브문학상 수상작인 유광수 작가의 SF 판타지 < 진시황 프로젝트 > 와 1회 멀티문학상 수상작인 김이환 작가의 스릴러 < 절망의 구 > 는 수상과 동시에 영화 판권 계약을 체결했다.
그 밖에 2007년 1회 창비청소년문학상에 당선된 김려령 작가의 < 완득이 > 도 대표적인 OS MU 상품이다. 반항기 가득한 소년 완득이가 괴팍하지만 심성 따뜻한 교사 동주를 만나 성장하는 과정을 따뜻하고 유쾌하게 그린 이 작품은 2010년 연극 무대에 올려졌고, 이한 감독의 연출로 현재 활영이 한창이다.
OSMU를 기치로 내건 문학상이 생겨나고, 기존 문학상에서도 수상작 선정 단계에서 영상화가능성을 고려하면서 일차적으로 '영화로 만들기 좋은' 소설이 늘어난 것은 분명한 현상이다. 소설 작가들 사이에선 "문학상 수상하면 영화는 옵션"이라는 말이 돌 정도. 문학상을 보유한 유명 출판사들은 아예 영상화 판권 계약만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부서를 꾸리고, 영화, 드라마, 연극 제작사의 판권 문의를 처리하고 있다.
한 출판사 기획팀장은 "계약 조건 때문에 제목을 밝힐 순 없지만, 인지도 있는 수상작(의 판권)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다. 한 제작사에서 네다섯 권을 싹쓸이하는 경우도 있다"고 밝힌다. 하지만 과열 경쟁의 폐해도 만만치 않다. 영화 제작사 콘텐츠 기획팀장들은 "출판사가 제작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비현실적인 판권료를 요구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반대로 대책 없이 판권만 사들인 제작사가 문을 닫으면서, 실제로 영화화가 가능한 제작사가 허탕을 치는 경우도 있다. 중견 영화 제작사의 팀장은 "그저 좋아하는 작가와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영화로 만들고 싶습니다!'라며 졸랐던 '낭만의 시대'는 갔다. 이젠 총알(판권 자금과 제작 가능 여건)이 없으면 좋은 소설의 판권 구입은 하늘의 별 따기다. 문제는 판권료의 기준 자체가 없어서 합리적인 경쟁도 쉽지 않다"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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