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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보는 오후>/영화보는 아침

[오동진의 무비+] 상실의 끝은 새로운 시작

*스포일러 주의

여자의 생일. 둘은 마주 앉아 케이크의 촛불을 끈다. 여자, 곧 나오코(키쿠치 린코)는 막 스무 살이 됐다. 남자, 와타나베(마츠야마 겐이치)가 한 살이 어리다. 둘은 대학 1학년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선물을 준다. 밖에선 조용히, 그러나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여자는 열여덟 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예전의 남자친구 기즈키(코라 켄고)를 떠올리는 듯, 시간이 열아홉에 멈췄다가 열여덟 살로 돌아갔다가 다시 열아홉 살이 됐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기즈키는 와타나베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나오코가 크게 흐느끼기 시작하고 와타나베는 그런 여자를 가만히 품에 안는다. 밖에서는 계속 비가 내린다. 처연한 느낌이 방 안을 감싼다. 둘은 그렇게 조용히 섹스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자는 처음이다. 나오코의 안에 들어간 와타나베가 묻는다. 왜 기즈키하고는 하지 않았어? 여자가 남자의 가슴을 밀어낸다. 남자는 묻지 말았어야 할 것을 물었다. 나오코가 떠난 것은 와타나베의 잘못이다. 적어도 와타나베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나오코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 상실의 시대 > 가 던지는 기이한 화두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 상실의 시대 > 를 원작 그대로, 그러나 사뭇 다른 느낌의 영상으로 만나는 것은 매우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매혹적인 일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 작품이 갖는 마력에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영화는 매우 느린 호흡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영화 속 세 명 혹은 네 명의 청춘 남녀 이야기는 결코 빠르게 진행시킬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들의 처절하고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는 빨리 얘기해서는 안 된다. 청춘의 사랑은 빨리 지나가지만 그 상실의 고통과 아픔은 오래오래 남는다. 아주 긴 시간의 자국을 남기는 법이다.

첨단화되고 고도화된 현대 사회의 흐름에 익숙한 사람들로선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의 공간을 목도하는 것이 매우 낯설고 이색적인 경험이 된다. 그리고 결국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왜 하루키는,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든 트란 안 훙은 왜 20여 년 전의 시공간으로 우리를 옮기게 했는가.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화 속에서 몇 컷 안 되는 장면이 그 해답이 될 수 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전공투(전학공투회의, 일본 대학가의 급진적 학생운동 단체)의 시대였다.

곳곳에서 과격한 시위가 줄을 이었다. 젊은이들의 피가 들끓었다. 실현될 수 없는 이상과 관념이 난무했던 시대다. 하지만 < 상실의 시대 > 의 주인공들은 그 흐름에서 한 발짝 비켜 서 있다. 그런 일들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인 양 오로지 서로의 마음속 고통을 치유해 주려 노력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노력하며, 어떻게든 세상의 모든 일들을 뒤로하고 함께 있으려고 애쓴다. 그들에겐 혁명이 따로 없다. 자신들을 위한 것이 혁명이며,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각목과 돌멩이, 화염병이 세상을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세상을 치유할 수는 없다.

철저한 개인주의야말로 < 상실의 시대 > 가 던지는 기이한 화두다. 시대가 어떻든 사람들은 늘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싸우고 고민한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구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인가. 정치적이거나 구조적인 것인가? 그래서 거대 담론을 먼저 체득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철학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인가? 그래서 스스로의 내면부터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인가. 정치와 경제, 사회과학적인 무엇은 결코 세상을 근본적으로 뒤집지는 못한다고 < 상실의 시대 > 는 얘기한다. 사랑, 애정, 섹스 등등 내 안의 욕망을 끝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오히려 세상의 변혁은 거리를 한참 두고 점점 더 도망을 가는 법이라고 얘기한다.

< 상실의 시대 > 를 에워싸고 있는 섹스 코드

주인공들이 거침없이 내뱉는 섹스에 대한 어휘들도 청춘들에게 있어서만큼은 순수한 무엇이다. 깊은 산속 요양원에 머무는 나오코를 찾아간 와타나베에게 그녀는 기즈키와의 섹스에 대해 얘기한다. 극도의 자기분열과 불안증에 시달리는 나오코가 갈대밭을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초겨울 아침의 찬바람이 두 사람의 등을 떠밀고 가슴을 밀어낸다. 나오코는 말한다. 기즈키와는 섹스가 되지 않았어. 그를 안에 넣으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젖지 않았어. 그게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기즈키에게는 손과 입으로 해줬어.

그런데 너하고 지난번 할 때는 그러지 않았어. 그날 너를 만나는 그 순간부터 나는 젖어 있었어. 그리고 나오코는 울부짖는다. 기즈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런 죄책감을 와타나베에게조차 갖게 한 미안함 때문에. 와타나베는 기즈키의 죽음에 대해 원죄의식을 느끼는 나오코를 치유하지 못한다. 구원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여자 미도리(미즈하라 키코)에게 손을 내밀게 된다. 단아하고 예쁜 외모지만 미도리 역시 마음속에 태풍을 안고 산다.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끊임없이 섹스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다. 아버지가 죽은 날,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전화를 한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알리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말한다. 둘의 대화는 흥미롭다. "언제 한번 나를 포르노 상영관에 데려다줘.""적당한 곳을 찾아볼게." 세상이 무너져 내릴 때 사람들에게 섹스에 대한 욕망이라도 남아 있지 않으면 세상과 함께 자신도 무너진다. 이때의 욕망은 일종의 생존이다.

나오코가 결국 자신이 만든 정신병적인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욕망하기 전에 남자가 죽었기 때문이다. 욕망의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마른 나무처럼 됐기 때문이다. 그녀가 결국 죽음을 택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눈이 펑펑 내리는, 초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산속 풍경을 풀샷으로 보여주면서 저 멀리 두 남녀가 섹스를 하는 장면을 롱 샷으로 담아낸 장면은 차라리 처절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와도 섹스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깊은 겨울의 산속에서 그녀는 남자에게 구강성교를 해주는 중이다. 그녀에게 와타나베는 또다른 기즈키다. 와타나베도 그것을 알지만 분열증을 앓는 그녀를 더 이상 어쩌지 못한다. 둘의 관계는 점점 더 깊은 산속마냥 파국으로 치닫는다. < 상실의 시대 > 를 에워싸고 있는 섹스 코드는 너무 짙어서 오히려 종종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섹스는 격랑과 혼돈의 시대에서 이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위적 수단이다. 그건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들이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와타나베는 친하게 지내는 남자 선배 나가사와(타마야마 테츠지)와 함께 종종 섹스의 향연을 벌인다. 나가사와는 자유연애주의자다. 잘생기고 세련된 그에게는 늘 여자가 많다. 그렇게 여자 주변을 부유하고 살지만 한 여자만큼은 지독하게 그를 사랑하며 어떻게든 나가사와를 자신만의 남자로 만들려고 애쓴다. 하지만 결국 나가사와는 그런 그녀를 버린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2년 후에 손목을 긋고 자살한다. 나가사와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할지 모른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과 부착된 모든 것을 버릴 필요가 있다. 상실의 철학이다. 와타나베는 나가사와를 이해한다. 다만 용서하기 힘들 뿐이다.

나오코가 와타나베를 떠난 후, 요양원에서 그녀와 함께 동고동락한 레이코(키리시마 레이카)가 그를 찾아온다. 30대 중반의 유부녀인 그녀 역시 자폐증과 우울증을 앓았다. 나오코에 대한 상실감은 두 사람을 밀착시킨다. 레이코는 와타나베에게 섹스를 부탁한다. 어색하지만, 그래서 한편으론 달콤했던 관계를 끝낸 후 레이코는 와타나베에게, 이제 다시 뭔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상실의 끝은 어쩌면 새로운 시작이다. 상실은 필연이며 그래서 인생은 계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상실의 시대 > 는 상실의 시대를 겪는다는 것이, 지독한 통과의례이긴 하지만 스스로가 성장하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상실의 시간은 한순간 휙 지나가버리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각자의 마음속에 영원한 표식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 표식을 가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 살아갈 힘과 욕망을 얻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청춘의 시절을 영원하게 기억하는 이유다. 유영하듯, 아름다운 풍광과 청춘의 마음 속 풍경을 오가는 트란 안 훙의 카메라는 지독할 정도로 인상적이다. 영화는 끝맺음이 없는 화법처럼 깊은 여운과 여백을 남긴다. 사라진 청춘을 위하여 건배. 그때의 아름다웠던 사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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