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은 성적 함의를 띤 추문을 일컫는다. 하지만 어떤 스캔들은 남녀상열지사를 뛰어넘어, 여태껏 거룩하게 여겨졌거나 신화로 군림해온 것들 또는 우리가 애써 은폐하고자 했던 것들을 폭로한다. '신정아 스캔들'이 그런 경우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늘 위엄과 순수를 가장해왔던 상아탑과 미술계의 치부는 물론이고, 소문으로 듣던 권력과 예술의 야합마저 탄로냈다. 서점에서 나이토 치즈코의 < 암살이라는 스캔들 > (역사비평사 펴냄, 2011년)을 발견하고 터져나온 탄성은, 제목 가운데의 '암살'이 스캔들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책을 사기 전에 목차를 먼저 살폈다. 책 제목은 2부의 소제목이기도 한데, 거기에는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된 민비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 각기 한 장씩을 차지하고 있다. 현대의 일본 학자는, 민비 시해와 안중근의 거사를 어떤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을까? 하지만 이 책은 나의 기대와 달리, 암살이라는 극단의 행위를 세계사나 정치 이론 속에 하나의 스캔들로 성립시키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니었다. 애초에 < 암살이라는 스캔들 > 은 번역본 제목이고, 원제는 '제국과 암살'이었다.
ⓒ이지영 그림 |
많은 저자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손가락을 따라, 일부는 국가 만들기에 일조한 소설을 분석했고, 또 다른 일부는 케케묵은 문서 보관소에 들어가 먼지 쌓인 신문을 들췄다. < 암살이라는 스캔들 > 을 쓴 나이토 치즈코는 후자였다. 지은이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청·일 전쟁 전후 시기를 겨냥하여 "이 잡듯이 신문을 훑어"봤다고 한다. 그런 끝에 지은이는 메이지 시대의 신문 기사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이야기가 병(病)과 여자에 대한 것임을 알게 됐다. 따지자면 이 사항 또한 그렇게 신선하지는 않다. 일본을 통해 근대를 수입하게 된 한국의 개화기 역시 병과 여자에 대한 서사를 통해 민족주의를 다듬어갔다는 연구는 꽤 흔하다.
의학은 근대에 들어 위력을 갖기 시작한 학문이다. 국가권력과도 궁합이 잘 맞았다. 한·중·일 가운데 서구식 근대화를 제일 먼저 성취한 일본은, 의학과 위생 정책에서도 단연 앞섰다. 일본은 앞선 의학 지식을 이용하여, 국내의 부락민을 질병에 취약하고 위생 관념이 없는 비국민으로 낙인찍었다. 원래 부락민은 일본 사회의 경제적·사회적 차별의 산물이었으나, 의학 지식이 그들의 육체와 피(유전인자)를 열등한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부락민이 대대로 당해온 경제적·사회적 차별은 정상적인 일본 국민의 눈에 더는 보이지 않는 것이 되었다. 부락민들은 신분 사회가 철폐된 메이지 시대를 맞이하여 신분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분류된 체계에 따라 합법적으로 차별받게 된 것이다.
서구 의학의 시선으로 다른 민족 차별
< 암살이라는 스캔들 > 나이토 치즈코 지음역사비평사 펴냄 |
메이지 시대의 정형화된 서사는 국내뿐 아니라, 조선과 중국으로 마수를 뻗었다. 일본은 자국의 부락민에게 그랬듯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의학적으로 열등한 인종으로 서사화했다. 서구에서 습득한 의학의 시선으로 조선과 중국을 포획하기 시작한 게 일본 제국주의의 출발이다. 제국주의는 언제나 다른 인종을 무수한 질병에 시달리는 허약한 신체로 규정해놓고, 그들을 문명으로 계도해야 한다는 구실을 삼아 침략을 정당화한다.
이 책은 당대의 유일한 미디어였던 신문이 대중에 영합하는 서사를 통해 어떻게 일본인의 사고와 욕망을 축조했는지를 보여준다. 그 적확한 예로, 당시 일본 신문이 조선을 쥐락펴락했던 민비를 조선의 병 덩어리로 즐겨 묘사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일본 언론은 민비의 자질을 설명할 때 항상 '히스테리'라는 단어를 썼으며, 다종다양한 질병과 관련지었다. 이는 일본인으로 하여금 조선이 병들어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병든 조선은 치료받아야 했다. 이 대목에서 지은이는 을미사변의 원인을 조선이나 일본 내부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찾는 정통적인 해석과 결별한다. "왕비의 암살 사건은 신문 미디어가 다방면으로 관여"하고, 미리 "살의를 구체화시킨" 결과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대한 지은이의 관점을 살펴보자. 일본 제국주의는 남성 중심주의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그 애착은 매우 강직하고 의지가 남다른 적(안중근)을 끌어안으면서, 그의 결단이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전적인 '오해'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일본에 유리하게 사건을 봉합한다. 지은이는 이 책의 제목으로 쓰인 '암살'을 이중적으로 사용한다. 하나는 사전적 의미의 암살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와 주류 미디어가 만들어낸 '정형화된 이야기를 암살하라'는 비유로서의 암살이다. 지은이는 정형화된 서사에 억눌렸던 여성의 목소리를 발굴하는 것이, 곧 정형화된 이야기를 암살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끝내, 민비를 명성황후라고 칭하지는 못하겠다.
장정일 (소설가) /
http://zine.media.daum.net/sisain/view.html?cateid=100000&cpid=131&newsid=20110812113524191&p=sis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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