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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시간

[프런트 에세이]한귀은 작가의 똑똑한 女, 예쁜 女, 팔자 좋은 女, 그리고 착한 女

진실, 진심, 진정성, 진리. 요즘 들어 의심되고 푸대접을 받고, 너무 무거운 말이라 여겨지며 문장에서 도태되는 용어이다. 여기서 이 용어들을 마음껏 쓰고자 한다. 그것도 매우 원색적으로. 이렇게 쓴다. 나는 진실, 진심, 진정성, 진리, 이런 것들만 추구하고 싶다고. 이것들을 찾는 과정에서 진짜 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이렇게도 써본다.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진실된' 사랑을 만나,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진리'를 만들고 싶다고.



이런 말을 하게 된 데는, 요런 말이 선행됐다. 똑똑한 女은 예쁜 女 못 이기고, 예쁜 女은 팔자 좋은 女 못 이긴다는 말. 나는 이 말을 똑똑하고 예쁜데다가 팔자까지 좋은 女에게서 들었다. 그 女은 자신이 똑똑하고 예쁜데다가 팔자까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은 경쾌하게 통통거렸다.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내겐 차마 불편한 심경조차 들지 않았다. 덩달아 재밌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스스로 약간은 똑똑한 女이라고 생각했기에 조금의 냉소와 함께 웃어주는 것으로 그 상황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헛돌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실은 어설프게 똑똑한 女이라서 예쁜 女을 못 이겼고, 팔자 좋은 女도 못 이기는데다가, 똑똑한 女들에게도 늘 열등감을 느껴야 했다.

모든 어설픔이 그렇듯 뭔가 똑똑하게 처리한다는 일은 바보 같은 일이 돼 있었고,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 이기심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언제나 손해 보는 일로 결론지어졌다. 삶은 결국 반성의 연속이었고, 그 반성의 횟수와 강도만큼 사람에 대한 믿음은 바닥이 났다. 혼자인 시간이 너무 많아져서 그 시간의 반은 공상하는 데 쓰고, 남은 반의반은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데 쓰고, 그래도 남는 시간엔 하릴없이 공부를 했었다. 그래도 남는 시간이라고 했지만, 그 시간 또한 너무 잦고 많았다. 남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일상에 없다는 것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많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해서 어설프게 공부 잘하는 女, 혹은 어설프게 똑똑한 女이 되었다. 어설프게 똑똑한 女이 되었기에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행착오 반복의 결과를 말하고자 한다. 마흔을 갓 넘긴 이 시점에 이 결과는 인생 중간보고서쯤 될 것이다. 나는 그 흔한 유서나,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을 기록하는 버킷 리스트(Bucket List) 같은 것도 쓰지 않았다. 그것은 시간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놓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결정지어져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간보고서나 쓰는 것이다. 별로 똑똑하지도, 예쁘지도, 팔자가 좋지도 못한 사람의 중간보고서.

그 결과는 이러하다. 착한 女이나 되자는 것. 착한 女이 되니 그래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되더라는 것. 착한 女이 되자고 마음먹고 그렇게 노력했더니 착한 男이 보이더라는 것. 그리고 그들과 관계라는 것을 맺을 수 있게 되더라는 것. 그 관계 속에서 행복감이 오더라는 것.

착하게 살려고 하는 착한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이해를 받지 못한다. 착하려고 하기 때문에, 진실만을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언제나 말이 모호하고 복잡해진다. 착한 사람은 자기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마음을 너무나 환히 보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화시키는 순간의 오류 혹은 거짓을 참지 못한다. 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려고 머뭇거리는 사이, 보통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를 떠난다. 착하게 살려 한 착한 사람은 자신이 착하지 않아서 상대가 떠났다고 생각하고 다시 반성한다. 착하게 살아야지, 라고.

시인 김수영은 '거짓말의 여운 속에서'라는 시에서 "나는 아무것도 안 속였는데 모든 것을 속였다"라고 했다. 이 자본주의 세계 속에 완전히 포섭되는 일이란, 아무것도 속이지 않았는데 모든 것을 속이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때론 생각한다. 물건을 만드는 일에도, 물건에 가격을 매기는 일에도, 건물을 짓는 일에도, 정치를 하는 일에도, 심지어 가르치는 일에도 '결론적으로' 속이게 되는 순간이 포함되는 것은 아닌지. 그걸 알게 될 때 괴롭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김수영을 진실한 시인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이, 늘 반성하는 사이, 착한 女은 착한 男을 알아보게 된다. 그 착한 男도 착한 女을 단숨에 알아보게 된다. 그들은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진실된 사랑을, 진심으로 하며, 그 사이에 진리를 만들게 된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A. Badiou)는 진리란 타인과의 진정한 마주침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 했다. 타인과의 마주침은 일어나기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볼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적절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하며, 타인이 내보이는 기호들을 해석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하며, 오해의 순간조차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마주침이 일어나고, 둘 사이에서 진리가 만들어지고, 그 진리를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행복이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 여기서 느끼는 것이라면, 착한 女을 이길 똑똑하기만 한 女, 예쁘기만 한 女, 팔자만 좋은 女은 없다.

착한 女과 男이 함께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히로세 미나부'와 '사쿠라이 요시히아' 감독의 '아름다운 도전(Big Wall Challenge)'이다. 남편이 돈 벌어 오고 아내가 아이를 낳고 집안을 돌보는 이야기가 아니다. 번 돈만큼 쪼개서 저축하고 쇼핑하고 집을 사고 그래서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부부가 암벽등반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부부는 히말라야 등반을 하다가 둘이 합쳐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여덟 개를 잃었다. 그런데도 다시 둘은 1,300m 수직의 그린란드 암벽을 올랐고, 영화는 그 등반 과정을 보여준다.

신기하게도 '아름다운 도전'에는 한 프레임에 두 사람이 함께 나오는 투샷(Two Shot)이 별로 없다. 롱샷(Long Shot)으로 잡아도 그들은 다른 프레임 속에 있다. 아주 멀리서 찍는 익스트림 롱샷(Extreme Long Shot)만이 겨우 그들을 한 공간에 넣는다. 암벽등반은 결국 혼자서 하는 거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다. 그러나 혼자서 암벽등반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둘이어야 한다. 혼자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둘은 서로의 비계(Scaffolding)가 되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은 리더를 번갈아 하면서 이끌거나 이끌린다. 어느 한 순간도 리더가 없을 수는 없다.

혼자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둘이 되어야 한다는 것. 서로 번갈아 이끌고 또 이끌리는 삶. 번갈아 리더가 되는 한 쌍의 삶. 그런 삶을 사는 착한 女과 男에게는 자본주의에 포획된 사람들이 겪는 우울, 권태, 슬픔, 무기력, 허무감, 피로감이 없다. 나태와 몽상도 없으며 결락감도 열정조차 없다. 이들의 암벽을 오르는 행위도 열정 같은 걸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이들에겐 열정이 불필요한 듯 보였다. 열정은 부재(不在)하는 어떤 것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우울함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들에겐 언제나 실재의 물질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산'이 기호나, 정복해야 하는 상징이 아니라 '실재'로서의 산이다. 자본주의적인 삶에 찌든 사람들은 실재가 아니라 어떤 관념이나 상징을 추구한다. 성공, 명예, 부 같은 것들은 불분명하며, 그것들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성취감은 다시 사라지게 된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산'도 정복해서 나 자신과 싸워 이겼음을 증명하는 상징이 되거나, 웰빙의 삶을 위한 오르막의 경사진 운동로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름다운 도전'의 부부들에게는 산뿐만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실재였다. 우리처럼 유기농 채소라는 자본주의적 '상품'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에겐 집 마당에 씨를 뿌려 키워낸 진짜 먹을 수 있는 채소가 있었다. 아내는 손가락은 없지만 채소를 기르고 요리를 해 남편과 함께 먹는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남은 네 개의 손가락으로 장비를 만지며 정돈하고 챙긴다. 아내의 말대로 돈도 필요 없다. 이들에게 돈은 등반에 관련된 과학적인 성과물들을 얻기 위한, 즉 장비 구입을 위한 교환가치만을 가질 뿐이다. 우리에게 돈이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를 넘어서 우리의 부(富)를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고 남에게 과시하게 만드는 기호가치인 것과 대조적이다.

"동료보다는 여자로서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이죠." 남편은 아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15년 동안 이들이 함께하는 이유였다. 아내는 남편에게 함께 산에 오르는 '몸'이며, 사랑하는 '살'이며, 언어라는 상징적인 기호가 되기 이전의 '육성'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연인을 만질 때에도 내가 알고 있는 연인의 이미지를 재확인할 뿐이다. 연인의 살 그 자체를 탐험하는 것이 아니다. 연인의 존재조차 내가 이상화하거나 조작한 이미지로 인식한다. 그래서 "당신 변했어"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녀가 변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나의 인식이 왜곡되게 고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도,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남편의 역할과 아내의 역할에 충실히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부부에게 사랑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만져지는' 손이며, 거칠게 '살에 와 닿는' 얼굴이다. 시간이 그들을 변화시키면 그들은 그 변화에 신기해하며 그 변화된 상대를 사랑한다. 이들에겐 줄리아 크리스테바(J. Kristeva)가 말하는 근원적인 '실물(Chose)'이 있다. 이 실물은 욕망의 대상도, 욕망의 대체물도 아니다.

다시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보자. 우리의 욕망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자 자크 라캉(J. Lacan)이 말했듯이 그것은 '무엇'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그 '무엇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무엇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다. '저 여인에게는 무엇무엇이 있을 거야', '저 남자는 내가 가지지 못한 무엇을 주겠지'라고 상상하며 그것을 상대에게서 찾아 헤맨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우리는 똑똑해야만 살아남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똑똑하게 사람을 '고르고', 자신에게 맞는 사람의 조건을 체크한다. 예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정형화된 미의 요건을 따라 페이스오프(Face-off)를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는 중에 실물 그 자체는 사라진다. 진짜 나는 없고, 그/녀의 진짜도 모르며, 진짜 내 살에 대한 느낌도 없으며, 그/녀의 몸 구석구석과 살 떨리게 만나는 순간도 없다.



착한 女과 착한 男만이 진짜의 것을 느끼고 향유한다. 거듭 인용하자면, 바디우의 말대로 '진리'를 만들 수 있고, 크리스테바의 말대로 '실물'을 느낄 수 있고, 라캉이 말한 욕망 이상의 욕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결국 '착한 사람'이란 상징이나 기호, 이미지가 아닌 실재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물과 실재를 수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할 것이다. '너'를 사랑한다, 라고 할 때 '너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의 환각이 아니라 실감으로 만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똑똑하고, 예쁘고, 팔자 좋은 女은 못 되어도 착한 女이 되는 것. 그것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되지 않을까. 많이 똑똑하지도, 별로 예쁘지도, 팔자도 그다지 좋지 않은 듯한 나는, 착한 女이나 되련다. 착한 女으로서,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진실된' 사랑을 만나,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진리'를 만들고 살련다.

물론, 내가 똑똑하고 예쁘고 팔자까지 좋았다면 이런 얘긴 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점도 솔직히 덧붙인다. 나는 착한 女이니까.
(첨언: 女에 'ㄴ' 받침을 붙이고, 男은 모음을 'ㅗ'로 바꾸어 읽어야 합니다.)

편집 후기


"결국 똑같은 이유야." 또 한 번의 실연을 겪게 된 그녀가 푸념을 시작했다. 가까이서 오래 알고 지낸 익숙함을 내려놓고서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자꾸만 연애에 실패할 만한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할 만큼 '괜찮은' 그녀였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예쁘고 자분자분 내려놓는 목소리가 따뜻하고,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적당히 똑똑한, 센스 있는 친구였다. 언제나 그녀는 공부도, 사회생활도, 대인관계도 큰 어려움 없이 잘 해내는 '잘 풀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달랐다. 쉬지 않고 누군가를 계속 만나기는 하는데, 지속되는 경우는 없었다. 이번엔 '보통의' 연애를 시작하나 싶으면 이번에도 곧 '아니'라고 했다. 패턴은 한결같았다. 남자들은 그녀의 '착함'을 좋아했지만, 그 '착한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거절했다. '안녕'을 고하던 그들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남긴 말은, 언제나 "넌 너무 착해"였다.

생각해보면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남자든, 여자든, 이 세상 상당수의 사람이 '착한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는다. 외모, 학식, 직업, 재력, 집안 같은 것들. 물론 모두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이 '착한 마음'이란 바탕 없이는 매력으로 발현될 수 없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왜 그녀의 '착함'은 매번 관계의 걸림돌이 되는 걸까. 거듭되는 실패를 반복하며 마음을 다쳐가면서, 비싼 대가를 치르며, 이유를 깨달아갔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그렇다. '착하다'는 말에는 명확한 구분이,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 '착하다'는 말을 '희생'이나 '헌신'과 같은 뜻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선한 마음으로 배려하고 소통하되, 얽매이거나 감정에 투신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즉, '상대'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착해지는 노력, 그것이 바로 진정한 '착함'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착한' 그녀는 사실 결코 '착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실 많은 이가 '희생'을 '사랑'의 다른 이름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명목하에 상대의 헌신을 강요하고, 자신의 소멸을 기꺼이 감수한다. '나'를 내던져 버리고 상대에게 헌신하는 것을 기쁨으로 대체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가시밭길이 펼쳐질수록, 상황이 비참해질수록, 더더욱 희생을 껴안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희생과 헌신은 '착한 마음'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사랑은 결코 상대방을 위해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선적으로 나에게, 그리고 나와 상대의 조화를 꿈꾸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원인이 되고, 내 스스로를 탐구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나의 변화를 파악하는, 스스로에게 솔직한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누르고 상대에게 모든 것을 바치며, 언제나 속으로 참고 견디기를 반복하던 '착한' 그녀는 다행히도 요즘 스스로에게 '착한' 남자를 만나 '비련의 여주인공'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솔직하되 질척거리지 않고, 욕심내되 속이지 않고, 선량하되 고루해지지 않으려 한다. 예뻐지려 노력하지만 꾸미지 않고, 똑똑해지려 애쓰지만 고르지 않는다. 물론 아직은 많이 서툴러 덜컹거릴 때가 많지만, 용기를 내고 '착해진' 그녀는 '진심'으로 '진실된' 사랑을 시작하고 있다. '착한' 그녀의 '착한' 사랑을 온 마음으로 지지한다.

한귀은 작가는…


1971년생, 마흔한 살이다. 원래 좀 슬픈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토록 영화 같은 당신」, 「이별리뷰」를 썼다. 한참 바닥까지 슬프고 나니 그 바닥을 치고 약간은 가벼워졌다. 가을이니 가을 영화 얘기나 할까? 김태용 감독의 영화 '만추'는 여자주인공이 남자를 기다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녀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행복한 자는 '기다리는 자'라고 생각한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만추'는 그러므로 '늦가을'이면서 '늦게 온 가을'이다. 다시 말해 '늦 행복', '늦게 온 행복'인 것이다. 예전엔 감히 행복이니 하는 말들을 하지 못했다. 지금은 조심스럽게 한다. 행복하다. 요즘은 행복하게, 자본주의 세계에서 여자가 살아가는 일에 대해 쓰고 있다.

<■글 / 한귀은 ■진행 / 이연우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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