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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시간

책, 정독할까 속독할까

책을 정독할 것인가 속독할 것인가는 책의 역사만큼이나 길고 긴 논쟁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음에 따라 결정할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책을 안 읽는 것이 문제인 시대에 독서법은 어느 쪽이든 나쁠 것 없다. 어떤 책이든 지하철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언제 어디서든 휙휙 읽어라. 그리고 눈여겨볼 만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을 때 멈춰라. 당신은 이미 정독과 속독의 귀재다.





정독은 매력 있고 속독은 필요하다

옛 선조들은 어린 시절엔 < 명심보감 > 을, 과거 시험을 위해 < 논어 > 를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동양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 시각, 서쪽에서도 < 플라톤 > 을 수백 번씩 읽고 있었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달하고 책 문화가 확산되면서 독서 방식도 바뀌었다. 한 해 전 세계에서 인쇄되는 책은 1백억 권. 한 권만 죽어라 파기에는 선택받지 못한 수많은 책(의 정보들)이 아깝다. 또한 하나의 현상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는 여러 책이 나오는 시대이니 책을 적게 읽을수록 불리해질 가능성이 높다. 속독이 '다독'을 뒷받침하는 만큼 어느 정도의 속독은 필요하다.

그러나 속독은 위험하다. 뜻을 잘못 받아들일 수 있고, 지은이가 책 속에 마련해둔 다양한 장치를 놓칠 가능성도 높다. 책을 읽고도 '남는 게 없다'는 푸념은 대개 속독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속독자들은 활자 중독자들인 경우가 많고, 텍스트를 읽는 데 급급해 의미를 곱씹는 과정을 건너뛰는 편이다. 시간이 지나면 정말로 머릿속에 남는 게 없어진다. 싸이월드 클럽 '책을 읽는 지성인들의 공간 르네상스' 회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이 '정독'을 택했다. 또 나머지 상당수가 책에 따라 달리 읽는다고 답했다. 일반인은 속독을 '빨리 읽기'로 인식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속독을 '정확하게 빨리 읽기'로 생각하기에 더욱 경계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속독자들이 독서 습관을 굳이 고치지 않으면서 단점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다. 두 번 읽는 것이다. 만화책조차 처음 읽을 때 놓친 디테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아이들의 경우 적당한 속도의 정독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좋다. 빨리 읽어도 이해를 못해서 여러 번 읽느라 시간을 끌어 언어영역 점수가 낮은 아이가 많다.)

발췌독, 정독과 속독의 한계를 채운다

"소설류는 속독으로 보고, 경영·인문서 등은 정독으로 본다"는 얘기, 들어봤나? 여기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물론 소설류는 단숨에 읽어야 맥이 끊기지 않아 소설의 재미를 100% 누릴 수 있긴 하다. 그러나 '킬링타임'용이 아닌 책들이라고 해서 전부 정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특히 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여행 에세이, 자기계발서들은 '이놈이 저놈'인 경우가 많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책들을 정독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책을 웬만큼 읽은 사람이라면 제목만 보고 책을 구입했다가 그전에 읽은 책과 흡사한 내용에 실망한 게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이런 책들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목차를 쭉 훑어본 후 눈에 띄는 내용만 골라 정독하는 것이다. 책을 사지 않고도 서점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물론 눈에 띄는 내용이 많다면 사서 보는 것이 낫다.(오히려 소설 쪽은 전체 내용이 죽 이어지는 스토리 형식이라 발췌독이 어려운 경우다.)

책은 첫 페이지부터 읽어야 한다고 믿어왔다면 그 믿음과 예의는 이제 버려도 된다. 책을 펴는 순간 당신은 중간부터 읽든 전체를 휙휙 넘기든 목차만 읽고 덮어버리든 그 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당신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끊임없이 유혹하는 건 그 책과 작가와 편집자의 능력이자 의무다. 그러니 독자는 정독이냐 속독이냐를 따지는 것보다 책을 고르는 안목을 터득하는 것이 우선이다.

마음의 소리에 '답'이 있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1쪽부터 100쪽까지 올곧이 속독으로 해치우는 사람은 없다. 스캔하듯 활자를 들이키던 사람에게도 정독의 순간이 몇 번이고 찾아온다. 어느 페이지의 어느 구절에서 잠시 멈추어 곱씹어보고 생각하는 순간 말이다. 반대로 스스로 정독을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일정 부분에서는 페이지를 휙휙 넘길 때가 있다. 그것은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똑같은 책을 읽더라도 사람마다 속독과 정독의 시점은 명백히 달라진다.

그러니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읽는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속독으로 책을 대충 읽고 있었으니 좀 더 꼼꼼히 읽어보자며 반성한다거나, 속독을 배워 1년에 1천 권 읽기 목표를 이뤄보자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좋다. 솔직히 말해서 답은 당신의 뇌에 이미 들어 있다. 실험해볼까? 어떤 책이든 한 10쪽쯤 읽어봐라.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 책은 휙휙 읽어도 되겠는데?" "어라, 천천히 뜯어볼 만한 책이군!" 스스로 내린 평가에 귀 기울이는 순간, 그 책을 읽는 방식은 벌써 정해진다. 씹는 맛이 있는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반드시 정독을 하게 되어 있다. 만약 속독을 했다면? 다시 그 책을 찾게 될 것이다. 독자의 습관이 아니라 책의 퀄리티와 작가의 능력이 독서 방식을 좌우한다. 확실한 건, 우리도 보는 눈이 있다는 거다.

진행: 최진주 기자 | 사진: 조상철 | 설문조사 협조: 책을 읽는 지성인들의 공간 르네상스(club.cyworld.com/book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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