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에 몸을 누이는 갈대 사이로 언뜻언뜻 개펄 향이 났다. 당장은 눈에 안 보여도 갈대밭 너머 지척이 바다다. 갈대 군락지인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에 자리 잡은 순천문학관은 초가집 외관이 소박해 첫눈에 알아보기 힘들다. 순천 출신 동화작가 정채봉과 소설가 김승옥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정채봉(1946~2001)이 나고 자란 전남 순천시 해룡면도 비슷한 냄새가 난다.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그는 고향에서 접한 바다·학교·나무·꽃을 동화에 옮겼다. 생가 근처에 문학관을 짓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방문객의 왕래가 잦은 순천만에 만들었다. 10월22일, 정채봉 귀천 10주기를 기리는 정채봉 동화잔치가 열렸다. 제1회 정채봉 문학상의 시상식도 함께였다.
2001년, 간암으로 투병하던 정채봉 선생이 작고할 당시 부인 김순희씨는 네 가지를 약속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두 자녀를 잘 결혼시킬 것, 정채봉 동화를 전집으로 묶어낼 것, 정채봉 문학관을 짓고 정채봉 문학상을 만들 것. 10년 만에 김씨는 약속을 모두 지켰다. 장성한 아들딸은 결혼을 했고, 정씨 동화에서 말썽쟁이 캐릭터의 이름으로 자주 등장했던 딸 정리태씨는 동화작가가 되었다. 2009년 샘터사에서 정채봉 전집이 나왔고, 지난해 10월에는 순천문학관이 지어졌다. 마지막으로 문학상이다.
ⓒ시사IN 임지영 순천문학관 입구에는 '동심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었던 동화작가 정채봉의 철학이 쓰여 있다. |
문학상이 유족의 의지만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다. 정채봉 선생의 후배 작가들로 이뤄진 '동화세상' 회원들이 십시일반 기금을 걷어 1000만원의 상금을 만들었다. 정채봉 선생은 1988년 서울 대학로의 한 출판사 창고에서 시문학아카데미 동화사숙을 열었다. 매년 수강자를 선발해 일주일에 한 번, 동화 수업을 했다. 이들이 동화세상이란 이름으로 모였다. 그렇게 시작한 모임이 현재 24기에 이르렀다. 20년간 동화세상이 배출한 작가만 100여 명이다. 정채봉 선생과 함께 후학을 가르치던 김병규 < 소년한국일보 > 편집국장은 지금도 인사동 집필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다.
이선희 현 동화세상 회장은 창고에서 동화 쓰기를 시작한 1기 출신이다. 월간지 < 샘터 > 에서 직장 상사로 정채봉 선생을 모셨다. 편집부장 출신인 그는 호불호가 강한 상사였다. 글 잘 쓰는 사람을 좋아하고 글 못 쓰는 사람을 싫어했다. 편집국 식구 중 재능 있는 후배들에게 동화 쓰기를 권유했다. 동화는 어린아이를 위한 글이라고만 알고 있던 후배들이 그의 손에 이끌려 동화작가로 등단했다.
'성인 동화'라는 신조어 만들어내
김현숙 아동문학 평론가에 따르면 정채봉 문학의 특징은 '어른이 읽는 동화'라는 점이다. 아이의 동심을 통해 어른을 깨우치는 동화라 그 대상이 아이보다 어른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동화와 소설의 경계가 선명하던 시절, 벽을 허물며 '성인 동화'라는 새말을 만들었다.
ⓒ시사IN 임지영 10월22일 동화잔치에 참가한 '동화세상' 작가들이 순천문학관 정채봉관 앞에 모였다. |
그는 작품집 40여 권을 남겼다. 암자로 흘러온 고아 남매의 이야기를 담은 대표작 < 오세암 > 은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지고 프랑스에서 번역 출간됐다. < 오세암 > 말머리에 그는 '동화를 쓴다는 사실에 행복하면서도 간혹 부끄러움을 느낀다. 행복하다는 것은 동화가 동심에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찾는 중에 젖게 되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맑음과는 거리가 먼 이 세상살이가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게 한다'라고 썼다. 동심은 정채봉에게 신앙이었다.
여수MBC 주최로 열린 이날 동화잔치에서는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백일장도 열렸다. 시제는 엄마, 친구, 바다. 흔들리는 순천만의 갈대숲 사이사이, 잠시 연필을 놓은 동심의 웃음소리가 이따금 울려 퍼졌다.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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