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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밥상

네 남자가 파는 황해도 요리, 하베스트

작은 한옥과 1970~80년대식 상점들이 자리한 계동 골목에 황해도 요리를 즐길 수 있는 모던 요릿집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 집, 착한 가격에 음식 맛 좋은 건 물론이고, 재기 발랄한 전시와 벼룩시장이 프로젝트처럼 열린다. 게다가 한 달에 한 번은 술만 가져오면 안주는 그냥 주는 파티를 연단다. 세상에, 이런 재미있는 공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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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안쪽으로 들어서면 계동에서는 보기 힘든 너른 마당이 모습을 드러낸다.2양옥집을 개조한 네모반듯한 외관에 통유리를 사용한 모던한 디자인이지만, 한옥의 주조색을 사용하고 검은 와편으로 장식해 주변 풍경과 자연스레 어우러진다.3하베스트는 황해도 요리 전문가 추향초 선생의 요리를 선보이는 정통 요릿집이기도 하다.

스타일 다른 네 남자가 뭉치게 된 사연

작고 오래된 주택이 오밀조밀 들어선 계동 골목. 차 한 대 겨우 빠져나갈 만큼 좁다란 일방통행길 중간 즈음에 '이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만큼 탁 트인 마당을 가진 양옥 한 채가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다. 황해도 음식 전문가인 추향초 선생의 아들 형제와 그들과 친한 형제 둘이 의기투합해 문을 열었다는 하베스트는 황해도 요릿집인 풍년명절의 음식을 모던 버전으로 선보이는 식공간이다. 첫째는 디자인을 전공한 요리사, 둘째는 영화 PD, 셋째는 시계 MD, 넷째는 디자인 관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하던 일도 성향도 다른 네 남자는 지난해 12월, 계동 양옥집을 개조해 "요리도 팔고 문화도 파는" 식공간을 만들고, 매일같이 수상한 일을 벌이고 있다.

이들이 뭉친 사연은 이렇다. 둘째와 넷째는 영화판에서 알음알음으로 알고 지내던 선후배 사이. 둘은 함께 사용할 작업 공간을 겸한 카페를 오픈할 생각으로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어머니 요리를 전수받아 10여 년 요식업에 몸담고 있던 첫째가 그 모습을 보고 차라리 어머니 요리를 보여주는 젊은 공간을 만들면 어떻겠느냐 제안해왔다. 그길로 둘은 오피스텔에 작업실을 얻고 합숙하며 오픈 준비를 했고 이 소식을 들은, 첫째의 십년지기 동생인 셋째가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었다. 각기 다른 네 남자가 뭉쳤지만 공통점은 바로 놀기 좋아한다는 것. 그래서 이곳에서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노는 다양한 파티와 전시가 어느 때고 열린다.

1층과 2층 어느 곳에 앉아도 계동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옥과 한옥 사이, 모던한 문화 공간

이들의 공간은 네모반듯한 현대적인 건물임에도 주변 한옥들과 전혀 어색함 없이 어우러진다. 본래 오래된 양옥이던 것을 개조한 것인데, 첫째는 리모델링을 계획하며 "계동 한옥 사이에서 모나지 않는 모던 공간을 만들라"는 미션을 내렸다고 한다. 셋째는 동네 자료를 수집하고, 둘째와 넷째는 인테리어 책을 뒤지고, 다 같이 안동 한옥마을에 내려가며 연구하기를 수차례. 꼬박 다섯 달의 연구 끝에 한옥의 주조색인 하얀색과 검은색, 나무색을 주조로 하는 지금의 디자인을 완성했다.

"셋이 모여 일주일 밤을 새워 디자인을 해 가도 큰형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초 만에 아웃되었어요. 그러면 다시 밤을 새워 연구하고 그렸죠. 그렇게 스케치한 디자인만도 몇백 장이에요. 아이디어가 넘치다 보니 그중엔 천장이 뚫려 있다거나 입구가 건물 뒤통수에 달린 말도 안 되는 디자인도 있지만요. 개량 한옥으로 만들까도 생각했는데, 집의 군더더기를 뜯어내다보니 집 자체가 예쁘더라고요. 그래서 기본 구조는 그대로 두고 한옥의 색을 응용한 지금의 디자인이 나오게 되었지요."

작은 한옥이 모여 있는 동네에서 이만큼 넓은 마당을 가진 집도 드물다. 그래서 마당을 충분히 활용한 이벤트도 기획했다. 그중 하나가 4월 15일에 열리는 플리마켓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매달 한 번씩 여는 패밀리데이다. 패밀리데이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신청한 10명의 사람을 불러 여는데, 삼겹살, 녹두지짐 같은 안주는 네 남자가 준비하고, 술은 손님이 마실 만큼 가져와 즐기면 된다. "네 사람 모두 노는 걸 워낙 좋아해요. 일요일마다 쉬는데 어차피 나가서 놀 거 그냥 가게에서 놀자고 뜻을 모았죠. 사람이 너무 많으면 감당 안 되니 매번 10명씩 모으는데, 선착순이기 때문에 빨리 신청 하셔야 합니다. JYJ 콘서트 티켓 살 때처럼 줄 섰다가 바로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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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요리는 간이 세지 않기 때문에 요즘의 음식 트렌드와도 잘 맞는다. 대표 메뉴인 간장게장도 짜지 않고 국물이 어찌나 맛이 좋은지 밥 한 그릇을 게장 국물로만 먹었다.2각종 재료를 올리고 국물을 부어 먹는 온반. 식재료가 풍부한 황해도에서는 육해공을 넘나드는 다양한 식재료를 활용한 요리가 발달했다. 특히 고기 중에는 닭고기가 맛있어 이를 활용한 요리가 많은 편.3오븐 양념 가오리구이. 황해도식은 본래 가오리를 꾸덕꾸덕하게 말린 다음 요리해 내는 것인데 추향초 선생은 이를 응용해 콩기름을 바르고 오븐에 구워 바삭한 맛과 속의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을 살렸다.4속 재료를 꽉 채워 빚은 수제 만두는 대부분의 메뉴에 사람 수대로 제공되는 웰컴 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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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남자의 하베스트는 단순히 요리만을 파는 곳이 아닌, 다양한 전시와 프로젝트가 열리는 문화 공간이다.2유난히 사선으로 된 디자인을 좋아한다는 넷째의 감각이 담긴 장식장. 2층 천장이나 대문 디자인 등 일직선이 아닌 디자인은 모두 넷째의 아이디어다.3메뉴판 대신 주는 메뉴 프린트. 1만5천원 코스도 훌륭하기에 4만5천원 코스는 도대체 어떨지 물었더니, 한 인간이 소화하기엔 버거운 양이라 본인들도 웬만해선 권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4이곳 와인은 모두 네 남자의 테이스팅을 거쳐서 어떤 것이든 믿고 주문해도 된다.

담백하고 맛깔 나는 정통 황해도 요리

사실 이곳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요리다. 추향초 선생은 우리나라 유일의 황해도 요리 전문가로 황해도 옹진이 고향인 어머니의 레시피를 전수받아 30년 동안 전통 한식 요릿집인 풍년명절을 운영해왔다. 아무리 콘셉트가 재미있고, 사람들이 좋아도 요리가 맛없다면 다시 찾기 꺼려질 터. 그런데 이곳은 요리 맛까지 훌륭하니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정통 황해도 요리를 요즘 식으로 구성해내는 것일 뿐, 어설프게 퓨전으로 변형하지 않았다. 덕분에 전문가가 만든 황해도 요리의 참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그래서 나이 지긋한 어르신 단골도 많다.

황해도는 육지와 바다가 맞닿은 지역인 만큼 고기, 생선, 채소 할 것 없이 다양한 식재료를 활용한 담백한 서민 요리가 발달했다. 양념을 많이 쓰지 않고 조리해 기교 부리지 않고 투박하게 담아낸 것이 특징. 황해도 요릿집 풍년명절의 인기 메뉴이자, 하베스트의 대표 메뉴인 간장게장은 간장을 쓴 게 맞나 싶을 만큼 짜지 않고 입에 착 붙는 감칠맛을 낸다. 짠맛이 거의 없어서 숟가락으로 국물을 푹 떠 후루룩 마셔도 될 정도. 숙성시킨 후 식탁에 올리기까지 일주일이 걸리는데, 한 번 만들 때 담글 수 있는 양이 고작해야 서른 마리정도다.

그래서 매일 먹을 수 있는 양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고, 하루 30마리를 모두 팔면 메뉴 종이에 'sold out' 도장이 찍힌다. 간장게장 때문에 이곳을 찾는 마니아가 많아 네 남자는 게장을 언제 다시 먹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원하면 먹을 수 있는 날짜를 알려주는 '문자 서비스'도 제공한단다. 토종닭에 녹두지짐, 표고버섯 등의 고명을 얹은 후 닭고기 국물을 부어 먹는 온반은 황해도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처음엔 양념 간장을 넣고 쓱쓱 비벼 먹다가 적당히 밥이 남았을 때 국물을 부어 먹으면 된다. 여기에 싱겁게 간한 가시리 굴국과 시원한 백김치를 곁들이면 밥 한 그릇이 뚝딱이다.

겁먹지 말고 들어오세요

세련된 분위기에서 제대로 된 한정식을 즐기자면, 만만치 않은 가격이 부담일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다. 속 재료를 실하게 채워 빚은 만두, 과일 소스로 맛낸 샐러드, 녹두지짐과 불고기구이, 그리고 가시리 굴국에 차지게 지은 영양밥까지, 이렇게 푸짐하게 차려진 한 상이 1만5천원. 심지어 바리스타가 뽑아준 커피와 수제 쿠키 디저트가 포함된 가격이다.

"한정식 코스 요리를 먹고 나면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괜히 배부른 게 싫었어요. 그래서 코스 순서를 줄이고 제대로 된 요리에 힘을 주자 했죠. 가치 있는 어머니의 요리를 젊은 사람들에게 좀 더 재미있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나온 결론이에요. 커피는 어차피 밥 먹고 나가서 마실 거니까, 식혜나 수정과 대신 커피를 주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한 거고요." 맛 좋은 음식에 저렴한 가격, 지극히 손님 관점인 서비스까지. 기분 좋고 푸짐하게 즐길 수 있는, 또 놀 수 있는 이 공간에 앞으로 자주 올 것 같다.

기획_오영제 사진_심윤석

http://media.daum.net/zine/lemontree/newsview?newsid=201205220754090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