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젊은이가 책상 위에 방문 모형을 놓고 핀을 이용해 문 따는 연습에 한창이다. 이들의 훈련을 담당하는 훈육관 김원석(안내상)은 가장 빨리 문을 딴 교육생에게 묻는다. "잘하면 전문 털이범도 되겠는데?" 그럴 일 없다고 답하는 교육생에게 원석은 재차 질문한다. "할 수도 있잖아.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방문 열쇠를 따다가 조국을 호출하는 이들은 MBC 드라마 < 7급 공무원 > 의 국정원 요원이다. 엄청난 능력을 지닌 공작원들이 국제적인 음모를 파쇄하는 본격 첩보물과 달리 < 7급 공무원 > 의 정서는 훨씬 알콩달콩하고 요원들의 캐릭터도 로맨틱 코미디 쪽에 가깝다. 여주인공 김서원(최강희)은 방송국 PD를 꿈꾸다 시험 유형이 비슷한 국정원에 먼저 합격한 경우이고, 남주인공 한길로(주원)는 007 영화의 제임스 본드를 우상으로 삼는 인물이다. 앞서 가장 빨리 열쇠를 딴 요원 공도하(황찬성)만이 특전사 출신에 국가관이 투철한 진짜배기처럼 보이나, 드라마는 신임 요원들의 합숙훈련 과정을 통해 그의 출중한 신체능력도 날라리인 길로보다 약간 뛰어나거나 엇비슷한 정도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서원은 첫 월급에 기뻐하는 생계형이고, 길로는 '멋지게 살고 싶어 지원'했으며, 도하 역시 조직과 동료의 힘을 빌려야 한다.
ⓒMBC 제공 MBC 드라마 < 7급 공무원 > (위)의 국정원 요원들은 조국과 양심 사이에서 고민한다. |
< 7급 공무원 > 이 그리는 국정원 요원은 훈련을 거쳤으나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이며 조금 특수한 일을 하게 된 직업인이다. 그래서 가족이나 연인의 죽음 같은 사적 복수를 동력으로 삼은 초인이 정보요원으로 암약하는 드라마에서는 종종 생략되는 질문이 던져진다. "네 양심에 걸리는 일이라도 할 수 있어?" 훈육관의 거듭된 질문에 잠시 고민한 공도하는 이내 확신에 찬 눈으로 '조국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다'고 답한다. 두 사람은 조국을 심중에 둔 가정법으로 대화를 주고받지만, 이 대목에서 각 요원의 애국심이나 충성심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햇병아리 신임 요원 중 누구는 월급 주는 회사에 대한 애사심 정도를 확장할 수도 있겠고, 소방관이나 경찰이 국민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처럼 국가의 안녕과 이익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훈육관이 자주 입에 올리는 '조국'의 무게가 시종일관 무거운 것만도 아니다. '뭐든 할 수 있다면 조국을 위해 노래 한 곡 뽑아보라'는 명령에 술 안 마시면 노래 못한다고 빼는 요원도 있으니까.
풋내기 요원들이 마음속에 품은 조국의 윤곽이나 사명감은 저마다 다를 테니 그들의 대답보다 훈육관 원석의 질문 쪽에 눈을 돌려보자. '조국을 위한다'는 일은 어디서 판단하고 명령할까? 요원이니 당연히 국정원일 거라 생각했는데, 흥미롭게도 < 7급 공무원 > 에서 명령체계를 갖춘 조직의 의지는 대개 생략되거나 조국을 위한다는 목적어 뒤에 숨어 있다. 조직의 의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간접으로나마 드러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1년 후 현장에 복귀한 원석은 경영난에 빠진 중소기업을 사들였다가 매각하는 특허기업 사냥꾼 한주만(독고영재)과 결탁한 산업스파이 일당을 잡기 위해 팀을 꾸린다. 그 팀에서 서원은 한주만의 아들인 길로의 마음을 사로잡아 한주만의 집 금고에서 기밀 서류를 빼오는 일을 맡게 된다. 옛 동기였고 잠시나마 마음을 나눴던 길로를 속이는 일에 괴로워하는 서원에게 원석은 자신의 과거 작전 경험을 이야기해준다. 원석이 속한 공작 팀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무기거래상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에게 생필품을 납품하던 두 사업가를 이용했고 무기거래상을 잡은 이후, 사업가 가족이 위험에 처했는데도 그들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던 것.
"그놈이 풀어낸 무기로 한 해 2만명이 죽었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 그게 결론이었지. 양심과 임무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은 언제고 존재해."
"국민을 지킨다는 이유로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 선택입니까?"
"그게 우리의 운명이다."
"임무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와도 양심은 버릴 수 없어요."
원석은 선택의 순간을 말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이는 주어진 임무, 즉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양심을 의식하게 된 순간에 관한 이야기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식의 가치 판단은 조국처럼 거대한 이름의 명분 뒤에서, 조직의 의지로 '결론'지어진다. 보안과 내부 결속을 중시하는 정보조직에서 개인의 양심에 근거한 판단이 선택지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조직의 의지를 수행하는 팀의 가치 판단이 만들어낸 희생양. 저 사업가 가족 중에 살아남은 자식들은 당시 요원들의 목숨을 노리는 복수자로 돌아왔다. 원석은 그때의 작전 이후, 사람을 이용하고 버리는 짓은 다시 안 하겠다 결심했고, 젊은 요원들은 선배들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것으로 쇄신의 길을 열어둔 셈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사명감이나 충성심만큼 개인의 양심도 개별적인 것이라, 조직의 과오나 잘못된 판단을 자정할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 7급 공무원 > 은 동기간의 동료애를 토대로 요원들 간의 관계를 짜고 동료애를 통해 서로의 양심을 비추지만, 그 동료애란 것도 실제 국정원 신임 요원들의 훈육 과정에서 엄청나게 강조되던 것이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료를 낙오시키거나 돕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벌점이 주어지는 시스템. 조국만큼 자주 입에 오르내리던 동기 사랑은 개인을 지우고 내부 결속을 다지는 목적이 분명한 훈육 과정이기도 하다. 훈육관 원석과 길로가 나눈 대화를 보자.
"동료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그게 나쁜 일이라도?"
"제 동료는 나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
"동료니까요. 죽든 살든 같이 갈 텐데 믿어야죠."
길로의 단순 무식한 대답. 너무 심플한 나머지 무척 멋져 보이기까지 한 저 답은, 아마도 조직이 원하는 가장 근사한 답일 것이다. 여기가 국정원을 배경으로 삼은 드라마 < 7급 공무원 > 의 매력이자, 한계다.
유선주 (TV 칼럼니스트) /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30305041606052
'<드라마보는 오후> > 우리나라 드라마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돈의 화신> 법을 쥔 자, 법을 벗어나리라 (0) | 2013.03.29 |
---|---|
'그 겨울' 조인성-송혜교, 남매가 남녀가 되는 진통 (0) | 2013.03.21 |
마침내 불어온 조인성·송혜교 바람 (0) | 2013.03.11 |
한국 드라마 단골 캐릭터 ‘실장님’의 진화 (0) | 2013.02.05 |
우리가 몰랐던 ‘지금 학교’를 들추다 (0) | 2013.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