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은 영·유아를 위한 책이다. 아직 혼자서 책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이 엄마 무릎에 앉아, 혹은 침대에 누워 엄마가 들려주는 글을 귀로 듣고 눈으로는 그림을 보는 것이 그림책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림책이 꼭 영·유아들을 위한 책만은 아니다. 글과 그림의 결합은 더 깊은 세계, 더 넓은 세계를 담아낼 여지를 풍부하게 만든다. 레이먼드 브릭스의 < 바람이 불 때에 > 는 핵폭발 이후의 묵시록적 세계를 담아내며, 니콜라이 포포프의 < 왜? > 는 전쟁의 기원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 한 권의 그림책이 있다. 권윤덕이 쓰고 그린 < 꽃 할머니 > 다. 가깝고도 먼 한·중·일 3국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그림책으로 마음을 모으자는 취지에서 만든 것으로, 이 그림책은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이가 탐구하는 인물은 식민지 시대 일본군 '위안부'였던 심달연 할머니다. 강제로 끌려가고 성노예로 착취당하고 넋을 놓고 살다 겨우 정신을 차려 꽃누르미(눌러서 말린 꽃과 잎으로 그림을 구성하는 일)를 소일 삼아 하시며 일상을 꾸려가는 분이었다. 이 '분이었다'라는 과거형은 그분이 2010년 일본의 사죄는커녕 후안무치한 외면 속에서 결국 눈을 감으셨기 때문이다.
< 꽃 할머니 > 권윤덕 글·그림/사계절 펴냄 |
그러나 정작 이 그림책에는 글과 그림에 앞서 권윤덕이라는 한 작가가 압도적으로 전면에 등장한다. 그이의 고통이, 그이의 탄식이, 그이의 눈물이 책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 출렁거린다. 고통의 심부에 닿아본 이들은 안다. 타자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마침내 자신의 고통으로 체험하는 법을. 그 체험이 예술적 결을 얻어 비감에 찬 울림으로 일렁일 때, 우리 또한 한 치도 비켜서지 못한 채 그 고통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왜 출판을 뭉그적거리나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이의 고통은 희망이다. 고통이 없는 세상을 향한 꿈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산나물이 먹고 싶으면 산나물을 뜯으러 가고, 동생과 헤어지기 싫으면 붙어 있을 수 있어야 한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당연히 스스로 행사해야 한다. 평화는 반바지에 슬리퍼를 걸치고 하드(아이스크림)를 핥아먹으며 저녁 산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인 한, 그 누구도 이를 막을 수 없다. 평화는 인간이기 위한, 모든 존재의 삶을 위한 최소한 지켜야 할 전제다. 그 꿈을 < 꽃 할머니 > 는 꾸고 있다.
더러 어린이문학으로서의 그림책이 무엇을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는지 자문해본다. 천진난만한 아름다움이 그림책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책 또한 삶을 엿보는 창일진대, 못 담아낼 현실은 어디에도 없다. 없는 법이다. 표현의 경계, 작가의 자기 검열은 예술의 치명적인 결함일지언정 결코 온유한 배려일 수는 없다. 진실을 향한 근본주의적 시각은 동화라고 해서, 그림책이라고 해서 완화되거나 비켜설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삶을 담아내는 예술이고자 한다면. 더욱이 3국이 공동으로 출간하고자 철석같이 약속했음에도 여전히 이 책의 출판을 뭉그적거리는 일본 어린이문학의 문화적 자기 검열이 지속되는 한.
김상욱 (춘천교대 교수·국어교육) / webmaster@sisain.co.kr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30605030107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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