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아빠. 제목이 심상치 않다. 문득 < 금붕어 두 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 > 이라는 그림책이 떠오른다. 에고, 금붕어 두 마리만도 못한 아빠에, 이젠 종이 아빠까지. 두서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책을 펼친다. 종이 인형이 오뚝 서 있다. 인형 모양을 오려내고 남은 종이가 바닥에 놓여 있다. 진짜 종이 아빠다.
"우리 아빠는 종이 아빠예요." 그렇다 해도 첫 문장은 여전히 도발적이다. 아이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어제는 아빠가 우유를 마시다 컵 속에 퐁당 빠져버렸는데" 찢어질 뻔했단다. 우유 컵 옆에 종이 인형이 널브러져 있다. 우유에 젖어 발이 허옇다. "우리 아빠는 종이 아빠라 자전거 밀어주는 일 같은 건 못해요." 하지만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어 멋지단다. 깃털 장식을 머리에 단 종이 인형. 스케치북에는 공룡 옷을 입은, 슈퍼맨이 된, 주방장이 된 아빠가 그려져 있다. 색연필과 가위, 풀, 색종이만 있으면 될 일이다.
자신의 세계에 갇힌 채 성장
화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보이는 건 예쁘장한 풍경과 거기 놓인, 그 자신도 그저 풍경에 불과한 종이 인형뿐이다. 아이는 계속 이야기한다. 종이 아빠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종이 아빠는 꽃하고도 돌하고도 친구하며, 종이 아빠와 있으면 모든 것이 예쁘고 새롭다고.
아이가 행복하다고 즐겁다고 하면 할수록, 그리고 그림이 곱고 따뜻하기만 한 세계, 이른바 '동심'의 세계를 보송보송하게 보여줄수록 점점 서글퍼진다. 어느새 풍경이 가짜로 보인다. 맛도 향기도 없고 딱딱한, 모양
만 그럴듯한 음식 모형 같다. 아이의 책조차 < 백설 공주 > 와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와 < 나니아 연대기 > 라니. 아이는 제 감정도 제 취향도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의 문을 닫았다.
아빠의 부재나 결핍은 어린이책의 고전적인 주제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제는 고전이라 할 앤서니 브라운의 < 고릴라 > 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사라진 종이 아빠를 찾아다니던 아이가 종이 아빠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순간은 다분히 퇴행적이고 또한 치명적이다. 아이는 스스로 종이 인형이 됨으로써 아빠와 함께할 방법을 찾는다! 쉽게 "구겨지고 자국이 나고", 물에 닿기만 해도 "흐물흐물해져서 찢어질" 종이 인형 말이다.
어린이에게 상상의 세계는 상처를 어루만지고 갈증을 푸는 곳이다. 그리하여 멀리서 깜박이는 희망을 찾아내고 고단한 현실 세계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길을 잃었다. 이 아이의 판타지는 무력하다. 웃음은 가짜고 상처는 치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그대로 두고도 삶은 지속될 것이고, 아이는 자신의 세계에 갇힌 채로 성장할 것이다. 박제처럼 생기 없이. 오랜만에 문제작을 만났다.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편집자) / webmaster@sisain.co.kr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30703080913269
"우리 아빠는 종이 아빠예요." 그렇다 해도 첫 문장은 여전히 도발적이다. 아이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어제는 아빠가 우유를 마시다 컵 속에 퐁당 빠져버렸는데" 찢어질 뻔했단다. 우유 컵 옆에 종이 인형이 널브러져 있다. 우유에 젖어 발이 허옇다. "우리 아빠는 종이 아빠라 자전거 밀어주는 일 같은 건 못해요." 하지만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어 멋지단다. 깃털 장식을 머리에 단 종이 인형. 스케치북에는 공룡 옷을 입은, 슈퍼맨이 된, 주방장이 된 아빠가 그려져 있다. 색연필과 가위, 풀, 색종이만 있으면 될 일이다.
< 종이 아빠 > 이한준 글, 김은기 그림, 한울림어린이 펴냄 |
화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보이는 건 예쁘장한 풍경과 거기 놓인, 그 자신도 그저 풍경에 불과한 종이 인형뿐이다. 아이는 계속 이야기한다. 종이 아빠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종이 아빠는 꽃하고도 돌하고도 친구하며, 종이 아빠와 있으면 모든 것이 예쁘고 새롭다고.
아이가 행복하다고 즐겁다고 하면 할수록, 그리고 그림이 곱고 따뜻하기만 한 세계, 이른바 '동심'의 세계를 보송보송하게 보여줄수록 점점 서글퍼진다. 어느새 풍경이 가짜로 보인다. 맛도 향기도 없고 딱딱한, 모양
아빠의 부재나 결핍은 어린이책의 고전적인 주제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제는 고전이라 할 앤서니 브라운의 < 고릴라 > 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사라진 종이 아빠를 찾아다니던 아이가 종이 아빠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순간은 다분히 퇴행적이고 또한 치명적이다. 아이는 스스로 종이 인형이 됨으로써 아빠와 함께할 방법을 찾는다! 쉽게 "구겨지고 자국이 나고", 물에 닿기만 해도 "흐물흐물해져서 찢어질" 종이 인형 말이다.
어린이에게 상상의 세계는 상처를 어루만지고 갈증을 푸는 곳이다. 그리하여 멀리서 깜박이는 희망을 찾아내고 고단한 현실 세계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길을 잃었다. 이 아이의 판타지는 무력하다. 웃음은 가짜고 상처는 치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그대로 두고도 삶은 지속될 것이고, 아이는 자신의 세계에 갇힌 채로 성장할 것이다. 박제처럼 생기 없이. 오랜만에 문제작을 만났다.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편집자) / webmaster@sisain.co.kr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30703080913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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