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것이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애절하게 갈구하다가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던 그와 그녀의 이별 장면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수많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리며 함께 아파했던 '여옥(채시라)'과 '최대치(최재성)'의 안타까운 사랑은 우리의 비극적인 근대사를 환기시키면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여성 여옥과 태평양전쟁에 강제 징집된 조선인 학도병 최대치,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반전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 토벌대 장교가 되어 역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장하림(박상원)'을 통해 친일파와 일본군 위안부, 제주 4·3항쟁과 한국전쟁,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 등 처참했던 근대사를 형상화했던 드라마 < 여명의 눈동자 > . 이 작품은 청산되지 못한 역사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면서 당대 대중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시사IN 자료 2005년 < 태왕사신기 > 를 촬영 중인 김종학 감독. 한류 시장을 겨냥한 < 태왕사신기 > 는 외형만 화려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라는 미명 아래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 했던 우리의 비극적인 근대사에 대한 드라마적인 성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국 드라마는 사회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영상예술로서의 역사를 새로이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김종학 감독은 바로 그 흐름을 주도했던 작가다. 사회학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범죄를 추적한 < 수사반장 > , 일제의 무단통치기를 배경으로 구한말 우국열사들의 활약을 다룬 < 조선총독부 > , 북한의 정치를 사실적으로 그렸던 < 동토의 왕국 > , 폭군으로 알려졌던 광해군을 실리외교의 명수로 재평가한 < 조선왕조 오백년-회천문 >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효종의 북벌 계획 의지 등을 주목한 < 조선왕조 오백년-남한산성 > 등 김종학 감독의 초기 연출작들을 관통하는 것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었다. 정치적인 내용이 금기시되다시피 했던 1980년대 방송 환경에서 역사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려 했던 그의 치열한 작가의식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외압으로 인한 연출자 교체 등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만약 이 시기의 작품들이 없었다면, 1990년대 초반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격변을 알렸던 < 여명의 눈동자 > 가 탄생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공동취재단 김종학 감독의 빈소에 마련된 영정. |
소재의 새로움과 작가의식의 치열함이 만들어낸 걸작 < 여명의 눈동자 > 는 드라마의 형식 미학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구실을 했다.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중국과 일본, 동남아 등지에서 촬영함으로써 영화와 다른 텔레비전의 영상미학을 독자적으로 모색했다. 특히 드라마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활용도가 높지 않았던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극적 상황에 대한 정서적 몰입을 유도하면서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킨 연출은 드라마 OST 음반 산업의 성황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 여명의 눈동자 > 를 통해 모색했던 영상예술로서 드라마 미학에 대한 그의 고민은 < 모래시계 > 를 통해 빛을 발하며 한국 드라마의 영상미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 모래시계 > 는 1979년 10·26으로 몰락한 유신정권의 뒤를 이어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대한 저항이 거셌던 격동의 1980년대를 배경으로 청춘남녀의 사랑과 열정을 그렸다. 이 드라마는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비극으로 현재진행형인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전면적으로 다루면서, 이른바 '386 세대'를 상징하는 드라마로 자리매김했다.
< 여명의 눈동자 > 에 이은 < 모래시계 > 의 미학적·산업적 성공으로 김종학 감독은 한국 드라마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각인된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한 작가의식으로 무장한 그의 연출은 시대적 아픔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성찰을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드라마의 문화산업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이처럼 한국 드라마의 미학적·산업적 발전을 견인했던 중심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던 김종학 감독은, 이후 방송 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장려되었던 외주 제작 사업에 뛰어들어 '김종학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제작자로 변신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제작자로서의 경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속적인 성장 가능성이 검증되기도 전에 거품부터 일었던 한류 문화산업이 기형적으로 성장하면서 한국 드라마의 제작 규모는 시장에 맞지 않게 급격히 팽창했다. 그 결과 한국 드라마는 외화내빈의 상태에 빠지면서 경제적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감독과 제작자를 병행하던 김종학 PD 역시 이런 상황에서 예외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김종학은 감독으로서 여전히 열정적이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주목한 그는 조선 시대 경제 드라마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장르 실험을 시도한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남자의 야망과 사랑을 담아낸 < 대망 > 을 한국 드라마로서는 최초로 HD 카메라로 촬영했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장르 실험이라는 욕심이 지나쳤던 때문인지, 최초의 HD 드라마라는 의미 외에는 미학적이나 산업적 측면에서 < 대망 > 은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러한 실패는 어쩌면 감독과 제작자라는 두 개의 자아가 충돌하면서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외주 제작에 뛰어든 뒤 연이어 실패
순조롭지 못한 제작 일정에도 불구하고 단군신화와 고구려사를 결합해 판타지 역사 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 태왕사신기 > . 이 역시 잃어버린 고토(古土)에 대한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김종학 감독의 특기였던 시대정신에 대한 통찰이 담보되지 못한 까닭에 < 여명의 눈동자 > 나 < 모래시계 > 같은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한류 드라마 시장을 겨냥한 초국적 혹은 탈국적 서사 전략은 < 태왕사신기 > 의 감독으로서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김종학은 산화돼버리고, 외형만 화려한 한류 드라마가 남은 꼴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상황은 시공을 초월한 '타임슬립' 드라마 < 신의 > 에서도 반복되면서 감독으로서나 제작자로서 그의 자존감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김종학 감독은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통찰력으로 한국 드라마의 역사를 새로 써내려간 작가였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던 그가 거품 때문에 실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한류 문화 산업에 희생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문화산업을 중심으로 '창조경제'를 육성하겠다는 정책 의지가 강한 2013년의 대한민국에서 열정과 능력을 겸비했던 감독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는 것을 과연 어느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았던 그는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통해 2013년 대한민국 문화 산업의 허상을 알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한국 드라마의 미학적·산업적 발전을 견인했던 김종학 감독의 처연한 죽음을 슬퍼하기 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었던, 기형적인 한국 드라마 산업의 병폐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한국 드라마를 대표했던 김종학 감독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가능해질 것이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국문과, 드라마 평론가) / webmaster@sisain.co.kr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308060854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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