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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보는 오후>/우리나라 드라마소식

아버지, 달콤한 권력을 주세요

돈이 궁하던 시절, 남자는 밀면 한 그릇을 나눠 먹던 아내에게 언젠가 이런 밀면 가게를 차려주마 약속했다. 그리고 30년간 리어카를 끌며 모은 돈으로 장만한 그의 가게는 1990년 신도시 개발 예정 지구에 포함되어 단 3개월 만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 상가 세입자인 까닭에 달랑 보증금 1000만원만 돌려받고 쫓겨나야 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던 그는, 농성장 강제 철거 과정의 화재로 인해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평생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이 남자의 아들 장태주(고수)는 이긴 자와 가진 자가 값을 쳐주는 세상의 셈법대로, 당시 시공사였던 성진건설의 사장 최민재(손현주)에게 굴욕을 안겼다. 성진그룹의 직계와 방계 혈통들이 벌이는 경영권 싸움에서 1000만원으로 '알 박기'한 땅 두 평을 이용해 10억원을 얻어낸 것.

태주는 그 돈으로 남은 식구들이 살 집을 마련하고 아버지의 밀면 가게도 다시 열었다. 복수도 일단락 지었으나, 태주는 한 그릇에 1500원, 하루 매상 30만원인 밀면집의 셈법에 안착하지 못한다. 단지 규모의 문제는 아니었으리라. 상대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에 눈이 밝은 태주는 그것을 손에 쥐고 줄타기를 하면서 '프리미엄'이나 '시세 차익'으로 가치가 뛰는 땅과 건물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다. 부동산 종합회사 '에덴'을 세우고 분양사업에서 승승장구하던 태주는 급기야 재개발 사업에까지 손을 뻗는다.





ⓒSBS 제공 왼쪽부터 최서윤(이요원), 장태주(고수), 최민재(손현주). 모두 그룹의 패권을 놓고 다툰다.

SBS 월화 드라마 < 황금의 제국 > 의 기획 의도대로 '서민의 아들 장태주가 황금의 제국을 장악해나가는 장쾌한 모습'을 보면서 '가슴 뜨거워지는 대리만족'을 느끼자니, 자꾸만 태주가 멈춰도 좋았을 대목은 어디였을까 돌아보게 된다. 밀면 집을 다시 세운 뒤? 혹은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재개발 사업만은 손대지 않는 게 좋았을까? 적이었던 최민재와 손잡지 말았어야 할까? 눈앞의 이익금을 판돈이 큰 게임에 다시 베팅하는 도박사처럼, 성진그룹의 지분을 얻고자 또 다른 게임에 뛰어든 태주의 시선은 '황금의 제국'이라 불리는 성진그룹의 경영권에까지 가닿았다. 애초의 동기는 완결되었고, 미사일 버튼의 결과를 모른 채 누르는 최민재보다, 행위의 결과를 알고 누르는 자신이 낫다던 태주의 주장은 그의 주변 사람들이 휘말리며 설득력을 잃었다.

심정적으로 편들어줄 사람이 없는 드라마 < 황금의 제국 > 은 윤리나 당위로 돌아가는 편한 세계가 아니다. 재벌가의 후계 다툼에 대해 적게 가진 자의 소박한 행복감을 만끽하며 '정신 승리'하기도 쉽지 않다. 화상을 입어 목숨이 위태로운 아버지의 수술비가 간절했던 태주가 강제 철거 피해자 가족들의 보상금 합의를 재촉하며 '당신들 모두 돈 있으면 땅 살 거잖아. 왜 착한 척해!'라고 울부짖었듯, 우리 모두 욕망의 공범이라 뭉뚱그리고 엷은 죄책감을 공유하기에도 각자 체급이 너무 다르지 않나. < 황금의 제국 > 을 보면서 욕망의 사이즈가 다른 인간들의 내면을 가늠하고 공통된 근원에서 시작해 갈라지는 분기점을 더듬다 보면, 종종 내가 가진 줄자는 너무 짧고 경험치도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해서, 박경수 작가가 극중 반복적으로 엮는 존재 '아버지'를 따라가보려 한다.


인물 모두의 욕망은 재벌 회장에게로


성진그룹의 총수 최동성 회장(박근형)의 건강 이상과 함께 불거진 후계 싸움과 계열사 나누기의 복마전 속에서, 그의 자식들이 자족하지 못하는 욕망의 구실을 찾을 땐 늘 '아버지'가 불려나왔다. 삼녀 최서윤(이요원)에게 밀린 허랑방탕한 장남 최원재(엄효섭). 그리고 백화점을 얻기 위해 입속의 혀처럼 굴던 차녀 최정윤(신동미)은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을 받았거나 당장 얻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치매가 온 아버지를 금치산자로 만드는 회합을 가진다. 자식들이 부모의 유산을 두고 다투는 일은 손바닥만 한 땅덩이에 집 한 채라도 남기고 임종을 앞둔 필부의 가정에도 흔한 풍경이나, 분쟁을 중재할 상속법은 최 회장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던 '황금의 제국'에는 미치지 못한다.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가련한 자식의 심정을 호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권한을 부정하는 원재와 정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애나 풍족한 유산이 아니라 다음 대에 승계할 권한이었다.

극의 배경이 1990년에서 1994년, 1997년으로 점프할 때마다 태주가 욕망의 범위를 확장하는 모습은 마치 아버지를 갈아타듯, 실패한 아버지를 부정하고 성공한 아버지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과정처럼 보인다. '잘못한 게 없'고 '한 번도 세상에 이겨본 일 없는' 태주의 아버지 장봉호(남일우)의 반대편에는 '수십 번이나 고소를 당했고, 몇 번이나 검찰 조사를 받았고, 시멘트 공장으로 시작해 불량 시멘트로 큰돈을 벌고, 멀쩡한 회사를 자금 압박해서 인수하고, 마흔두 개의 계열사를 만든' 최동성 회장이 있다. 태주가 그처럼 살아보겠다고 최동성의 삶을 기웃거리는 이유가 착하고 정직하게 살았던 아버지에 대한 애증에서 출발하듯, 최동성 회장의 동생 최동진(정한용)의 장남인 최민재도 형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구두를 닦고, 옥살이를 대신하면서 회사에 희생했으나 그룹 경영권에서 떨려난 아버지의 삶을 애증으로 바라본다.

이들 모두의 욕망과 접점을 가진 최동성 회장. 치매로 정신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나이 든 임원들을 그룹의 모태가 되었던 시멘트 공장 시절로 돌려놓을 정도의 카리스마로 오랜 시간 성진그룹을 호령해온 그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후대에 기업을 넘길 때까지 셋째 딸 서윤이 자신을 대리하기를 바란다. 아버지의 삶에서 한 발짝 떨어져 학자의 길을 가려던 서윤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생을 마무리하기 위해 아버지의 후광과 아버지의 짐을 지고 아버지의 방식을 따르는 중이다. 한편 군 시절 빼돌린 기름으로 시멘트 기계를 샀고 형을 대신해 희생해왔으니 약속대로 절반을 나누자는 동진. 불량 시멘트로 인한 아파트 붕괴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기업을 강탈당한 청마건설의 안주인이었던 한정희(김미숙) 등, 그룹의 지분과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들의 회고를 통해 퍼즐처럼 맞춰지는 성진그룹의 역사는 그룹을 후대에 넘기는 최동성의 권한이 온당한지 의문을 품게 한다.

그리고 퍼즐의 나머지 조각은 아버지대의 회한과 아집, 미망에 대한 반동에서 출발한 자식들이 채워넣을 것이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를 좋아하지만" "아버지처럼은 안 살겠다"라고 다짐하는 이들이 최동성이 움켜쥐었던 그룹의 패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유선주 (TV 칼럼니스트)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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