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움츠렸던 몸이 기지개를 켰다. 이유 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면 봄이 왔다는 신호다. 부드러운 바람과 따뜻한 햇살. 어느새 다가온 봄을 만끽하며 서울의 오래된 동네를 걸었다.
소박하고 아늑한 골목 풍경 속으로
봄이 오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다.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 작고 오래된 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서촌이다. 높은 빌딩과 차들이 달리는 광화문을 지척에 두고도 느긋할 수 있는 곳, 더없이 느린 걸음으로 낮은 한옥과 작은 골목들이 만들어내는 소박하고 정겨운 풍경을 감상하며 거닐 수 있는 곳이다. 우선 시장 구경부터 하기로 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보이는 금천교시장은 과일 가게와 정육점, 쌀집, 철물점 등 언뜻 보아도 관록이 느껴지는 오래된 가게들이 터를 잡고 있는 곳이다. 어스름 해가 질 무렵이면 술 한잔을 기울이러 온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정신없이 떠들썩했던 시장도 한적한 주말 아침, 한 템포 쉬어간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작은 시장 골목을 채우고 노란 메주가 봄볕에 몸을 뉘이고 있다. 금천교시장의 명물인 간장떡볶이 할머니도 오늘은 쉬시는 날인가 보다. 아담한 국수집,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분식집을 지나 이어지는 길로 발길을 옮기니 오래된 한옥들이 들어앉은 야트막한 동네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회벽 대신 콘크리트로 담을 쌓고 기와와 양철 지붕이 맞닿아 있는 서촌의 한옥은 책에서 보던 우리나라의 전통 한옥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를 떠올리게 하는 친숙한 모습이다. 이 작은 골목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보물찾기 하듯 구석구석, 멈춰 있는 서울의 시간을 들이마신다.
옛것과 새것이 어우러지다작은 동네들이 사이좋게 어깨를 부대끼며 맞닿아 있는 서촌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조용한 듯 떠들썩한 곳이기도 하다.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는 마을버스와 따르릉 울리는 자전거 소리, 책가방 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을의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서촌은 원래 조선시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던 곳이었다. 겸재 정선의 '
인왕제색도'가 탄생한 곳이고 소설가 이상과
시인 윤동주, 화가 이중섭 등 문인과 화가들이 이곳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다.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아득한 골목길을 걷다 보니 금세 사위가 조용해진다. 이곳의 모든 길이 나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것 같은 기분, 그 시절 문인들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싶다. 몇 해 전부터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이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공방과 카페들은 이제 꽤 많은 수를 이루고 있다.
통인동과 옥인동, 누하동 일대, 오랜 시간 마을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온 상점들과 새로 들어선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방과 엽서, 액자 등 디자인 소품과 서촌 관련 안내서를 얻을 수 있는 '옥인상점', 삼청동에서 누하동으로 자리를 옮긴 빈티지 숍 '
동양백화점', 멋스러운 소품과 찻잔을 파는 앤티크 상점 '티쉬운트'와 이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선술 바 '
바르셀로나'까지, 보물 같은 공간들을 찾아 걷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솔솔 봄바람을 타고 퍼지는 갓 구운 빵 냄새가 산책을 더욱 즐겁게 한다.
봄기운 가득한 고즈넉한 서울길
여유롭게 서촌을 둘러보고 동쪽으로 향했다. 통인시장에 들러 유명한 기름떡볶이를 맛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장을 빠져나와 자하문로를 건너면 청와대 앞 동네인 효자동 일대로 이어지는데 이곳 역시 그냥 지나치기엔 아깝다. 대림미술관과 진화랑을 비롯해 크고 작은 갤러리들과 신진 작가들의 작업실, 빈티지 가구 매장을 연상시키는 카페, 독립 출판물 등을 판매하는 중고 서점 등 독특한 컨셉트의 공간을 품고 있는 곳이다. 같은 서촌이면서도 먼저 둘러본 자하문로 서쪽 동네들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정부청사 별관과 경복궁이 맞닿아 있는 돌담길은 제법 멀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낮은 한옥들을 잇는 좁은 골목길에서는 작가들이 그려놓은 벽화도 만나볼 수 있다. 중고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산 후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맑은 하늘 아래 시원한 가로수가 뻗어 있는, 언제 와도 운치 있는 길이다. 청와대 앞길로 들어서니 길을 안내하는 꽃나무들이 따뜻한 봄 햇살 아래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청와대를 찾은 관광객들을 비롯해 아이들 손을 잡고
주말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모두 얼굴엔 따뜻한 미소가 가득하다.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과 청와대 춘추문을 지나 삼청공원까지, 봄기운 가득한 고즈넉한 길을 걷다 보니 서울의 봄이 이곳에 다 모여 있는 듯하다. 잠시 삼청공원 그네에 앉아 재잘대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북촌을 넘어
안국역에 다다랐다. 어느새 길어진 그림자, 봄기운에 노곤한 하루가 저물어간다.
서촌에서 북촌까지, 서울 산책길
경복궁역 2번 출구↔금천교시장↔필운대로↔옥인동↔통인시장↔효자동↔청와대 앞길↔삼청공원↔가회동 북촌 일대↔안국역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조민정>
http://media.daum.net/zine/ladykh/newsview?newsid=20130408173807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