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는 시간

상상과 모험의 심부름 길

어린 시절 심부름은 모두 내 차지였다. 내가 심부름을 가야 했을 때, 위의 두 형은 엄마 말보다 여학생들 뒤꽁무니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나이였으며 당연히 심부름꾼이 딱 필요한 시점에 집에 붙어 있지도 않았다. 물론 나 또한 집이 아닌, 집 앞 공터에 있기는 했다. 그러나 골목 앞 공터는 마치 앞마당처럼 '그만 놀고 들어와'라고 하면, '좀만요'라고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심정적 거리 속에 있었다.

처음에는 무언가 필요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도 없지 않았으리라. 때로는 물건을 잘못 사와 지청구를 들으며 되돌아간 적도 있었으리라. 오는 길에 막걸리를 반 넘게 마시고 해롱댄 일도 없지 않았으며, 해찰하다 돈을 흘리고는 문 앞을 뱅글뱅글 돌던 망연하고 또 자실했던 때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제 나는 그때의 형들, 아니 그때의 아버지보다도 더 나이 들었다. 그러나 때로 한 권의 책만으로도 훌쩍 나이를 넘고 세월을 비켜, 그때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갈 때가 있다. 그 한 권의 책은? < 심부름 말 > 이다.

그림책은 '나는 심부름하러 갈 때가 제일 좋아요./ 심부름하러 갈 때는 심부름 말을 탈 수 있거든요'로 시작해, '내겐 너무 멋진 심부름 말이 있어요'로 끝난다. 심부름으로 두부 한 모를 사러 가고, 또 돌아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이야기로 만드는 것은 의당 말이다. 아이는 심부름 말을 타고 오가기 때문이다. 물론 상상이다. 그러나 당연히 현실이기도 하다.





< 심부름 말 > 김수정 글·백보현 그림상출판사 펴냄

아이의 마음속 출렁거림 느껴져

나 역시 자전거를 타고 심부름을 다녀오고는 했다. 아주 급할 때는 자동차를 탈 때도 적지 않았다. 핸들과 브레이크를 자유자재로, 때로는 가까스로 사고 위험을 모면하며 다녀왔다. 더욱이 양쪽으로 팔을 벌리기만 해도 비행기까지 탈 수 있었다. 주인공 아이는 말을 탄다. '다가닥다가닥' 골목을 벗어나고, 놀이터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 인적 드문 내리막길을 나는 듯 달려 '미니슈퍼'에 도착한다. 고삐를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두부를 사면, 아주머니도 '말을 타고 왔네' 하는 듯 밖을 내다본다. 아이의 어쩔 수 없는 현실과 상상을 미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참견하고 또 유혹한다. 그래도 아이는 말과 하나가 되어 또각또각 뿌듯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심부름을 끝낸다.

먹의 아취가 느껴지는 제목의 표제를 비롯해 말 그림 역시 예스러운 정취를 담고 있다. 가는 선으로 형태를 부여하고, 갈색을 주조로 색을 덧입힘으로써 입체감을 얻는다. 배경이나 인물은 오래된 벽화의 효과를 주기라도 하듯 균질적이지 않다. 그런 채색은 이야기가 지금 여기의 이야기가 아님을 드러내며, 넓은 화폭에 다양한 재료를 적절하게 섞어 재료의 디자인적인 자질을 효과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이를 통해 무엇보다 그림 속 아이의 표정과 동작선들을 아주 정확하게 재현함으로써 아이의 마음속 출렁거림에 가 닿을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이 그림책이 돋보이는 것은 앞뒤의 이어지는 면지가 갖는 이야기의 완결성 때문일 것이다. 이 그림책의 면지는 여느 그림책처럼 펼침면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첫 번째 면지에 이어 또 한 번의 면지가 펼쳐지며, 두 번째 오른쪽의 면지에서부터 이미 이야기가 빛깔을 넘어 의식으로 진전된다. 그리고 서사의 결정적인 단서를 이루는 마지막 면지가 있다. 그것은 할아버지 목마다. 안경 너머 신문을 보는 할아버지 옆에는 네 마리 말이 있고, 아이들이 노래와 어울려 목마를 타고 있다. 그 가운데 한 마리 말은 이제 막 주인을 잃었다. 심부름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짝꿍 여자아이는 '빨리 갔다 와!' 하며 손을 흔든다. 뒷면지의 구성도 다르지 않다. 아이는 두부를 사들고 간다. 그러나 마음은 다급하다. 다른 아이가 자신이 비워둔 자리에 타기 위해 할아버지와 흥정을 한다. 내 말인데, 다른 아이가 타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림책은 면지를 활용한 액자의 구성 속에 매끄럽게 현실과 상상을 결합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책이 좋다. 다만 나는 이 글작가와 그림작가의 따스하고도 놀라운 협응이 옛날 어린이를 만나는 지금의 어른이 아니라, 지금의 어린이를 만나는 또 다른 지금 어린이를 형상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조금은 간절하게.

김상욱 (춘천교대 교수·국어교육) /

http://media.daum.net/zine/sisain/newsview?newsid=20130516034115516

'책읽는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이름은 삐삐롱스타킹  (0) 2013.05.22
왕자와 거지-극과극의 경험 놀이  (0) 2013.05.22
프랑스가 주목한 한국의 아동문학  (0) 2013.05.09
아이의 시선으로 사회를 꾸짖다  (0) 2013.05.09
신의  (0) 2013.01.07